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극적인 연출, 즉 정치공학적 계산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능적인 감도 뛰어나다.
작년 7월 대선 유세 도중 피격을 당했던 때에도 귀에서 흐르는 피가 얼굴을 타고 번지는 가운데 주먹을 불끈 쥔 채 ‘파이트(Fight)!’라고 연신 외친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당시 선거 판도를 뒤흔들며 '신(新) 보호무역'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상징되는 '트럼피즘(Trumpism)'의 재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2일(현지시간) 오후 4시가 넘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은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의 철강 근로자, 농민 등이 50년 이상 착취당했다"라고 주장하며 "오늘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경제적 독립기념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최소 10%에서 최대 49%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수백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던 것과 달리 이날 서명과 식을 거행한 장소는 성조기들을 배경으로 한 '대통령의 정원'이라 불리는 백악관 로즈가든이었다.
191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부인 엘렌 윌슨이 장미(로즈)를 심으면서 조성된 정원이다.
역사적으로 주요 정책 발표와 국가 간 정상회담의 무대 역할을 해왔기에, 집권 후 첫 로즈가든 행사에서 상호관세를 발표한 것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극적인 연출을 세계에 공표하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발표 퍼포먼스는 지난 1996년 개봉한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후반부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 나온 미국 대통령은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과의 마지막 전투 출정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할 권리, 존재할 권리를 위해 싸운다"며 "오늘은 우리의 독립 기념일"이라고 역설했다.
다만 영화 속 연설은 (미국이 중심이 될지라도) 인류의 공존을 의미했지만, 트럼프의 연설은 미국만의 영광을 강조했다는 점이 다르다.
대립 구도 또한 영화 속에선 '인류 vs 외계인'이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선 '미국 vs 세계'로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70여일 넘게 보여 준 행보는 미국의 이익과 힘의 논리로 요약된다.
미국 우선주의 아래 극한의 실리와 거래만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심지어 글로벌 무역시스템이 해체 위험에 빠지고 미국도 금융위기급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 교역국을 상대로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한 다음 날인 3일 뉴욕증시는 시총이 3.1조달러(약 4502조원) 증발하며 팬데믹 확산 초기였던 2020년 이후 5년 만에 최악의 하루를 맞았다.
특히 S&P 500 지수는 이날 하락으로 지난 2월 고점 대비 약 12% 떨어지며 다시 조정 국면에 진입했으며,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승리 이후 저점 기록을 경신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뉴욕증시 폭락에도 아랑곳없이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분야 관세 도입이 "아주 곧"(very soon) 이뤄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외국산 자동차에 이어 반도체 관세까지 한국의 대미 수출 1, 2위 품목이 모두 '트럼프발(發) 관세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역사적 장면이 써진 이 날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출한 또 다른 리얼리티 쇼일까. 벌써 3선 도전을 언급하며 "농담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벤트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좌우한다는 게 씁쓸하기만 하다.
더 최악은 트럼프로 인한 불확실성이 이제 시작됐다는 점이다.
조강욱 국제부장 jomaro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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