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기와 훈련기 등 22대가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의 전부였다.
전투 이틀째인 6월26일 공군 조종사 10명이 급히 한국을 떠나 일본 이타즈케의 미 공군 기지로 갔다.
그곳에서 미군의 지도 아래 1주일간 ‘벼락치기’로 전투기 조종술을 익힌 한국 조종사들은 7월2일 F-51 머스탱 전투기 10대를 몰고 귀국해 곧 실전에 투입됐다.
F-51은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한 낡은 기종이었으나 한국으로선 감지덕지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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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4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된 라창준(1928∼1952) 공군 소령을 기리는 현양 행사가 열려 고인의 영정 앞에 추모의 꽃이 놓여 있다. 전쟁기념사업회 제공 |
1928년생인 라창준 당시 1등상사는 L-4를 몰고 적의 대공포가 빗발치는 전선 위에서 정찰과 통신 임무를 수행했다.
연락기에는 폭탄을 장착할 수 없어 뒷좌석 조종사가 손으로 폭탄을 들어 적진의 표적을 향해 던지는 식으로 전투에 가담했다.
남침 사흘 만인 1950년 6월28일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미군 군사고문단 소속 L-4 2대가 있었다.
라 1등상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연락기들을 구출해 경기 수원 기지로 무사히 귀환시켰다.
이 같은 공로로 라 1등상사는 부사관에서 장교가 되었다.
1950년 10월 소위로 임관한 그는 이듬해 3월 중위로 진급했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마침내 F-51 조종사가 된 라 중위는 전쟁 기간 총 57회의 전투 출격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대위 시절인 1952년 4월 그에게 북한 지역 황해도 송림제철소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
송림제철소는 150t급 용광로 3기와 200t급 용광로 2기를 갖춘 한국 최초의 제철소다.
안타깝게도 이 작전 도중 라 대위는 적의 대공포에 맞아 24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소령으로 1계급 특진과 더불어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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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초반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던 한국 공군은 그림과 같이 L-4 연락기 뒷좌석 조종사가 손으로 폭탄을 들어 적진의 표적을 향해 던지는 식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6·25 전쟁 기록화 |
행사에 참석한 손양영 함경남도 지사는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의 라 소령이 호국 인물로 선정되어 같은 도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조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라 소령의 숭고한 뜻이 계속 전해지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부사관으로 출발해 장교로, 또 연락기 조종사로 시작해 전투기 조종사로 거듭난 ‘의지의 인물’ 라 소령이 이번 현양 행사를 계기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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