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벌어 힘겹게 만든 터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어요.”

지난 28일 경북 의성군 안망천 일대에서 만난 이광구씨(66)·이훈옥씨(64) 부부는 폐허가 된 양봉장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벌통 350개, 훈연기, 원심분리기, 비닐하우스 등 벌꿀 수확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이 화마에 휩쓸려 남은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2021년 대구에서 귀농한 이씨 부부는 불길이 자신들을 덮친 25일 오후 4시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하늘에서 불똥이 폭탄 떨어지듯 쏟아지며 불과 몇 분 만에 사방이 불바다가 된 것. 이씨 부부는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음에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못했다”며 “양봉장에서 농막을 치고 살았는데 이제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울먹였다.
역대 최대 규모의 피해를 낸 경북 산불이 모두 진화됐으나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28일 오후 5시께 찾은 의성군 단촌면 구계1리 마을. 경북 산불이 모두 진화됐다는 산림 당국 발표 소식이 마을회관에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길거리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었다.
60~70여명의 노인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지난 22일 발생한 산불로 대부분 폐허로 변해버렸다.

강정구 구계교회 목사(60)는 “마을로 복귀한 24일 오후 8시 주민들과 함께 잔불 정리 작업을 해 그나마 예배당은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교회 교육관 등으로 쓰이던 일부 건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다.
산불로 피해를 입은 후평리 마을 역시 주민들이 모두 대피소로 떠난 듯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마늘을 재배한 것으로 보이는 밭은 검게 타버렸고, 가축 사육장은 화재로 으스러져 닭 사체가 보이기도 했다.
갈 곳을 잃은 4~5마리 닭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목줄에 묶인 진돗개는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 허공만 쳐다보다가, 가끔 사람이 지나갈 때 살려달라는 듯 몸부림쳤다.
이곳 주민 김삼식씨(71)는 “대부분이 안동 체육관으로 대피한 걸로 안다”며 “그래도 오순도순 살던 마을이었는데 산불로 집을 잃은 이웃들이 영영 떠나 마을이 썰렁해질까 불안하다”고 말했다.

불로 가옥이 타버린 귀농 청년들도 막막하긴 매한가지다.
의성군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100억원을 들여 2018년 조성한 ‘고운마을’이 대표적이다.
25가구 중 19가구가 전소됐다.
보증금 500만원, 월세 200만원이라는 저렴한 임대료로 생산·여가·커뮤니티 활동을 마을 안에서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젊은 귀농 청년 사이에서 각광을 받아온 마을이다.
그러나 이번 산불로 귀농 청년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4년 전 귀농한 고운마을 주민 박진하씨(46)는 “의성에서 어르신 활동 프로그램 등 강사로 일하며 정착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라고 했다.
한편 이번 산불로 전소된 천년고찰 고운사도 울음바다 그 자체였다.
고운사에선 불교 신자들이 연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0년 넘게 고운사를 다녔다는 신도 권춘희씨(75·안동시 일직면)는 “이게 전장이 아니면 뭐냐”며 말끝을 흐렸다.
고운사 총무국장 도륜스님은 “산불이 종료되고 피해복구가 이뤄지는 데 긴 시일이 걸릴 것 같다”면서도 “복원이 하루빨리 이뤄질 수 있게 범정부 차원에서 머리를 맞대 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21일부터 영남지역을 휩쓸고 간 산불의 주불은 이날 모두 진화됐다.
경북 산불은 일주일만인 지난 28일, 경남은 열흘 만인 30일 오후 1시께 완전히 진화됐다.
마지막으로 잡힌 건 경남 산청 산불의 주불로, 지난 21일 오후 3시 26분께 산청 시천면 한 야산에서 발생한 뒤 213시간 만에 꺼졌다.
이번에 발생한 11개 중대형 산불로 인한 산림 피해(잠정)는 4만8236.6㏊로 집계됐다.
9개 산불이 집중된 영남에서 30명이 숨지고 45명이 다치는 등 사상자 75명이 발생했다.
경북 의성에서 발화해 안동·청송·영양·영덕 등 5개 시군으로 확산한 경북 북부 피해가 가장 컸다.
전체 산림 피해의 93.7%(4만 5157㏊)가 집중됐다.
이는 역대 최대 피해로 기록된 2000년 강원도 동해안 산불(2만 3794㏊)의 2배에 달한다.
경북 의성=변선진 기자 s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