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대기업 기술탈취에 우는 中企
원청, 위법인지 알고도 갑질 ‘여전’
하도급 계약조건으로 기술자료 요구
경쟁사에 넘기고 하청업제 바꾸기도
피해기업, 거래관계 유지 위해 침묵
세계일보, 기술탈취 21건 전수조사 해보니…
47.4%가 6개월 지나 피해 사실 인지
공정위 의결까진 평균 36.14개월 걸려
과징금 1억 미만 12건… 10억 이상 2건
하청업체가 대기업 등 원청업체로부터 기술탈취(기술자료 요구 및 유용)를 당한 뒤 경쟁당국의 최종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평균 약 3년의 기간이 걸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권리귀속 관계 등을 보장하는 서면 없이 기술자료를 요구받아 건네주는 사건의 경우 대부분 1억원 미만의 과징금이 부과되는 등 제재 수위도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원청업체들은 하도급 계약 체결 과정에서 자동으로 기술자료 제출 동의서를 받는 등 기술탈취를 심각한 위법행위로 생각하지 않거나 납품단가를 인위적으로 후려치기 위해 하청업체의 기술을 마음대로 유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술 침해부터 공정위 판단 평균 3년
19일 세계일보가 2018년 6월부터 이달까지 최근 5년 동안 공정거래위원회가 의결한 기술탈취 사건 21건을 전수 조사한 결과, 하청업체(피해기업)의 마지막 기술탈취 시점 이후 공정위의 판단이 내려지는 데 평균 36.14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간별로 보면 마지막 기술탈취 시점부터 공정위 최종 의결까지의 기간이 1년 미만인 경우는 1건에 불과했다.
1년 이상 2년 미만은 6건, 2년 이상 3년 미만은 3건, 3년 이상 4년 미만은 5건, 4년 이상 걸린 사건은 6건으로 나타났다.
피해 회복 기간이 이렇게 늦어진 건 중소기업이 기술탈취를 빠른 시일 내에 알아차리기 힘든 데다 일부 사건의 경우 공정위 조사 기간이 길어진 때문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중소기업은 기술 보호 전담인력이 부족해 피해업체의 47.4%가 6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기술 침해 사실을 파악했다.
또 기술탈취 사건의 처리 지연을 막기 위해 공정위가 2015년 7월 조사개시일부터 3년 이내 사건을 종결하는 조항을 신설했지만 조사 기간만 3년에 달한 사건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태양광 스크린 프린터 도면 유출 사건의 경우 2016년 10월 공정위 서울사무소에 사건이 정식으로 접수된 뒤 2019년 10월에야 결론이 났다.
과징금을 액수별로 보면 1억원 미만이 12건으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 대기업 등 원청업체가 하청업체의 기술자료를 받은 뒤 서면을 발급하지 않은 경우였다.
지난달 한 현대차 계열사가 하청업체에 정당한 사유 없이 기술자료를 요구한 사건은 시스템 개발 분야와 관련한 첫 제재였음에도 과징금은 2000만원에 그쳤다.
기술자료를 하청업체와 경쟁하는 업체에 넘기는 등 기술 유용이 더해진 경우 과징금은 그보다 높게 결정됐다.
1억원 이상 3억원 미만, 3억원 이상 5억원 미만이 각각 2건으로 나타났다.
또 5억원 이상 10억원 미만이 3건으로 조사됐다.
과징금이 10억원을 넘는 경우는 2건으로 파악됐다.
◆우월적 지위 악용 기술탈취
기술탈취 사건은 원청업체가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기술자료를 요구하고, 이를 마음대로 유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정위에 따르면 대기업 A사는 2016년 1월 굴삭기 등에 쓰이는 핵심 제품인 하네스 구매 가격을 낮출 목적으로 기존 납품업체의 도면을 다른 하네스 제조업체에 전달했다.
기존 납품업체로부터 구매하는 가격을 낮추려는 시도였다.
결국 도면을 전달받은 경쟁업체가 낮은 가격의 견적서를 제출하는 등 가격 인하 압박이 커지자 피해업체는 공급가를 최대 5%까지 인하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B사는 2015년 8월부터 2017년 2월까지 이차전지에 포함되는 부품의 제조를 위탁하고 납품받는 과정에서 각종 기술자료를 요구했고, 이메일을 통해 받은 뒤 자신의 내부 시스템에 등재했다.
문제는 기술자료 요구서에 하청업체의 거의 모든 기술자료가 총망라됐고, 자료 요구 목적도 불분명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을’의 입장인 하청업체들은 이런 요구를 전부 수용해 기술자료를 몽땅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자금난에 빠진 하청업체의 기술자료를 빼내 경쟁업체에 제공한 사례도 있었다.
자동차 도어 관련 부품분야에서 국내 1위 업체인 C사는 회생절차 중인 하청업체의 자산을 인수하려 했지만 비용이 예상보다 커지자 인수 대신 다른 업체로부터 낮은 가격에 부품을 납품받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업체로부터 기술자료를 빼내 경쟁업체에 전달했다.
C사는 법률자문을 통해 이런 행위가 하도급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술탈취를 했다.
또 대기업 D사는 선박용 조명기구 납품 관련 하청업체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기존 업체의 도면을 새로운 하청업체에 넘겨주기도 했다.
D사는 “수급사업자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실수”였다고 말했지만 공정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기술탈취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경쟁당국의 제도 개선은 더딘 상황이다.
공정위는 2019년 기술 유용에 대해서는 전속고발제를 폐지하고, 기술 유용으로 발생한 손해액을 추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술 유용 사건에 대한 고발 문턱을 낮추고, 손해배상액을 둘러싼 논란도 없애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4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세종=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
<본 콘텐츠의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세계일보(www.segye.com)에 있으며, 뽐뿌는 제휴를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
|
등록안내
등록안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