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추모행진… “책임자 사과해야”
서울광장 분향소 기습 설치… 유족·경찰 충돌
“엄마는 여기서 우리 재현이가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준 밝고 예쁜 아이라는 걸, 그런데 너무 억울하게 죽었다는 걸 사람들한테 말해주려고 해. 재현아, 내 새끼. 사랑한다.
”
이태원 압사 참사 100일을 하루 앞둔 4일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와 유가족협의회가 서울광장에서 시민추모대회를 진행했다.
대회에서 발언에 나선 희생자 이재현군의 어머니는 “(재현이가) 하루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친구들이 너무 보고싶어. 나만 살아남은 게 너무 미안해.’ 이 잠깐의 대화가 참사 이후 43일간 재현이가 제게 자기 생각을 말한 유일한 대화였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군은 참사 현장에서 구조됐지만 트라우마와 2차가해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해 이태원참사의 159번째 희생자가 됐다.
이군 어머니는 “재현아, 우리 재현이 친구들 만났지. 그곳에서는 재현이 속마음 마음껏 털어놓고 잘 살 수 있는 거 맞지”라며 “엄마 힘낼게 재현아. 엄마 갈 때까지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잘 지내야 돼”라고 덧붙였다.
 | 지난 4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설치된 10·29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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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운에 맡기는 사회…재발 방지 대책 필요”
희생자 유연주씨 가족 유정씨는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서바이벌식 생존을 해야 하냐”고 규탄했다.
유씨는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듯 저는 이번 10·29 참사에서도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렇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하루하루 생명을 운에 맡기며 살아가고 있다”며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이번 참사가 왜 발생했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반드시 되짚어 봐야 한다.
참사의 원인 규명은 희생자의 죽음에 대한 의문점 해결에서 시작하지만 그 끝은 이같은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그는 “저희의 시간은 10월29일에 멈춰 있는데 월드컵, 성탄절, 설 등 수많은 날들이 저희를 지나쳐갔다”고 했다.
“누군가는 저희에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한다”며 “저희도 떠난 가족을 마음 편히 놓아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 159명에 대한 약 1000개의 궁금증이 저희 발목을 붙잡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유씨가 말한 궁금증은 △매년 실시하던 다중인파 운집 대비를 올해는 실시하지 않고 마약 수사에만 집중한 이유 △의식을 잃어가는 아이 앞에 있던 부모들에게 주민센터에 가서 실종신고부터 하라고 한 이유 △압사 신고를 받았음에도 경찰이 출동하지 않은 이유 △아직까지 유가족들에게 유가족 명단을 공유하지 않는 이유 등이다.
그는 “유가족이 원하는 것은 성역 없는 진상 조사와 참사에 대한 원인 규명”이라며 “그날 이태원역 1번 출구 골목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녁 먹고 올게’라며 나간 동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는지 알고 싶다.
동생이 떠난 이유와 경위를 알아야 진정한 애도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호소했다.
 |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등 참석자들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에 마련된 이태원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출발해 서울역을 지나 광화문 광장을 향해 '100일 추모행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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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행진 녹사평역 분향소 출발…“책임자 사과해야”
시민대회에 앞서 이날 오전 11시에는 녹사평역 인근 합동분향소에서 이태원참사 희생자 추모행진이 있었다.
행진은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으로 시작됐다.
대표발언에 나선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광화문광장 세종로공원 분향소 설치를 불허하고 언론플레이 하는 서울시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며 “서울시가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광화문에 분향소를 마련해 시민들을 만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후 단체들은 녹사평역 3번 출구 앞에서 ‘대통령은 공식 사과하라’는 대형 현수막을 펼치고 행진을 시작했다.
빨간 목도리를 한 유가족 150명이 대열 가장 앞에 자리했고, 종교단체와 시민단체에 소속된 시민들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거리에 있던 시민들도 행진에 합류하면서 행렬은 점차 불어났다.
유가족 측은 약 20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은 “국가 책임 인정하고 대통령은 공식 사과하라”, “참사의 최고 책임자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파견하라”, “성역없는 진상 규명을 위해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하라”는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걸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희생자 이름을 호명하기도 했다.
“ 항상 사랑받아야할 사람 김세랑님, 기억하겠습니다”, “하늘의 별이 되다 김대원”, “심장과 같았던 아들 김현수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 박노영님”, “최선을 다해 살아간 예쁜 장한나님”, “다시 만날 때까지 열심히 살고 있을 이도희님” 등 20명의 이름을 호명하면 행진하는 사람들은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등 참석자들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에 마련된 이태원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출발해 서울역을 지나 광화문 광장을 향해 '100일 추모행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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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전주에서 올라와 이태원역 1번 출구 옆 해밀톤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는 이정녀(51)씨는 ‘국가도 없고 대통령도 없지만 유가족분들 곁에는 국민이 있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이씨의 손을 꼭 붙잡은 11살 아들도 반대편 손에 ‘유가족분들 힘내세요 국민이 함께합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씨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나라와 대통령은 관심도 갖지 않는 것 같다.
유가족분들이 너무 마음 아파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삼각지역 인근 대통령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행진은 잠시 멈췄다.
주최측이 나눠준 ‘대통령 공식 사과해라’, ‘행안부 장관 파면해라’ 피켓을 손에 든 유가족들은 대통령실을 향해 가족을 잃은 슬픔을 토로했다.
한 유가족은 “내 딸 살려내라 이놈들아”, “대통령은 정신 차려라”고 울부짖었다.
다른 유가족은 두팔로 머리를 감싸며 절규했다.
참사로 조카를 잃었다는 50대 여성은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무너진다.
시간이 지난다고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면서 “여전히 가족 모두가 이름조차 꺼내기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와 함께 이날 아침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20대 딸도 “책임자 처벌이나 재발 방지 대책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에겐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질 일이 아닌데, 책임자들은 점차 잊는 것 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녹사평역에서 자원봉사 하고 있다는 김지애(26)씨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 이태원 참사를 또 겪은 건 ‘살아남은 자들의 또 한번의 죽음’이다.
시민들의 관심이 많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서울광장 분향소 기습 설치…경찰 충돌에 유가족 병원 이송
오후 1시를 넘어선 시각, 시청역 5번 출구 앞에 정차된 트럭 앞을 유가족들이 둘러쌌다.
유가족 측이 “분향소를 설치하겠다.
경찰을 막아달라”고 외친 뒤 기습적으로 분향소 설치하기 시작했다.
유가족 측은 트럭에서 원목 테이블 등 분향소에 필요한 용품을 꺼내 서울도서관 앞 서울광장으로 이동했다.
협의회 관계자는 “서울시에 광화문광장 내 추모공간 설치를 요청했는데 시와 정부가 협조하지 않아 오늘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시는 지난달 31일 안전사고 우려 등을 이유로 광화문광장 세종로공원에 희생자 추모공간을 설치하겠다는 유가족 측 요청을 불허했다.
당시 시는 대안으로 녹사평역 지하 4층에 임시 추모공간과 소통공간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서울광장에 모여든 시민 등을 향해 경찰이 “시민들이 위험하니 (분향소) 설치를 중단하라”고 경고하자 시민들은 “경찰은 물러나라”고 응수했다.
경찰 바로 앞에서 대치하던 한 유족은 젊은 경찰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희도 힘들잖아. 책임자 나와라. 나이 든 사람 나오라고”라며 눈물을 흘렸다.
오후 2시15분쯤 분향소 설치가 마무리되고 영정사진 159개가 분향소에 올라갔다.
하지만 오후 2시20분쯤 서울시 공무원 70여명이 분향소 철거를 위해 진입을 시도하면서 또 다시 유가족 측과 충돌이 발생했다.
양측 대치 속 시 공무원들이 밀고 들어왔고, 유가족 한명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119구급차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유가족협의회 관계자는 “경찰이 밀려 들어오면서 순간적으로 쇼크 상태가 온 것 같다.
다행히 지금은 (상태가) 양호해졌다”고 전했다.
세계일보는 이번 참사로 안타깝게 숨진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의 슬픔에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조희연·이예림·이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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