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김지하,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넬슨 만델라도 명단에...전두환 군부 골치
결국 출국 불허...외신 보도 입막음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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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81년 11월 전두환 군부가 김대중과 김지하의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소식에 골머리를 앓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임영무 기자 |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81년 11월 18일, 정부는 주한 오스트리아 영사관으로부터 "크라이스키(Kreisky) 재단에서 김대중과 김지하에게 '인권 옹호상'을 시상한다"며 "이들이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재단은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였던 브루노 크라이스키가 설립한 곳으로 인권 공로자 등에게 시상하는 단체였다. 민간 재단이었지만 실질적 운영은 집권당인 사회당에서 관장하고 있었다.
정부는 크라이스키 재단을 '좌경적 색채가 농후한 단체'라고 규정하면서도 고심에 빠졌다. 김대중과 김지하 등 민주 투사들을 탄압한다는 비판을 받는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던 것이다. 수상자 명단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의 아버지' 넬슨 만델라도 포함돼 있었다.
정부는 외무부(외교부)에 "김대중과 김지하가 시상식에 불참한다면 재단이 어떻게 대응할지 탐문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외무부는 재외공관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고 두 가지 방안을 고안해 냈다.
첫 번째는 김대중과 김지하를 시상식에 불참하게 하는 대신, 주한 오스트리아 영사관을 통해 상패와 상금을 전달받는 방안이었다. 앞서 김지하는 1980년 6월 19일 네덜란드 소재 국제시인협회로부터 '위대한 시인상'에 선정됐지만, 당시 복역 중이었던 터라 출국할 수 없었다. 이후 약 6개월 뒤인 1981년 2월 19일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을 통해 상패와 상금을 전달받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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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부는 김지하의 출국을 검토했지만 이는 오롯이 대외적 이미지 쇄신 등 정책적 효과를 위해서였다. 다항에는 "설혹 동인의 해외여행 중 다소 정부에 불리한 발언이 있더라도, 동인에게 여사한 해외여행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적극적 조치의 대외적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적시돼 있다. /외교부 |
두 번째 안은 김대중을 제외하고 김지하만 참석시키는 방안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내란 음모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 징역으로 감형돼 청주교도소에 복역 중이었다. 반면 김지하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출국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외무부가 김지하를 검토한 이유는 그를 철저히 외교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외무부는 김지하를 이용한다면 기대되는 효과로 △인권 문제 관련 대외적 이미지 쇄신 △구주(유럽) 지역 정치권 인사 관계 개선 △한국 민주사회당의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가입 교섭에 유리한 여건 형성 등을 꼽았다.
외무부는 만일 김지하가 직접 상을 받으러 가게 된다면 그를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외무부는 "해외 체류 시 반정부 언동을 하지 않도록 협력을 구하고, 현지 공관으로 하여금 김지하의 체류 기간 중 적절한 신변 보호 및 지도를 통해 대외적으로 물의가 제기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며 "시상식 참석 시 주최 측으로부터 김대중에 대한 근황 문의가 있다면 이를 완곡한 방법으로 응하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외무부는 내부 회의 끝에 두 번째 안이 가장 현실적이라 판단했고, 김경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우병규 정무제1수석비서관에게 이를 전달했다.
그때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전문 한 통이 날아왔다. 크라이스키 재단이 시상식 불참자에 대해서는 '해당 국가의 해외여행 불허'로 이곳에 오지 못했다고 발표, 언론이 관련 내용을 보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대중과 김지하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다면 '전두환 정권이 이를 막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올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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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부는 크라이스키 재단이 시상식 불참자의 사유를 '해당 국가의 해외여행 불허'라고 발표한다는 동향을 입수한 뒤,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에 재단을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외교부 |
외무부는 급히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에 크라이스키 재단을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외무부가 내세운 논리는 △시상식 사실을 촉박한 시일에 알게 된 점 △김대중이나 김지하, 또는 그들의 대리인으로부터 해외여행 신청이나 희망 의사 표시를 전달받은 적 없는 점 등이었다.
정부가 김대중과 김지하의 인권상 수상 사실을 처음 인지한 때는 11월 18일이었다. 시상식은 11월 27일로 적어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시간은 충분했지만 정부로서는 애초부터 이들을 출국시킬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크라이스키 재단은 수상자의 항공비와 체류비를 모두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가 승인만 내려준다면 출국은 어렵지 않은 문제였던 셈이다. 김대중과 김지하에게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소식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결국 김대중과 김지하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정부가 걱정했던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2개 일간지에서만 크라이스키 재단의 시상식 소식이 전해졌을 뿐, 김대중이나 김지하 또는 한국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향후 상패나 상금 전달과 관련된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외교 문건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당시 정부로서는 김대중과 김지하의 수상 자체보다 이들로 인해 벌어질 국제사회의 비판에 더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지하는 강원도 원주 원주교구청에서, 김대중은 옥중에서 뒤늦게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전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