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범죄자를 자기와 다른 존재로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선 악마화라고 한다.
자기 존재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본다.
범죄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교도소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간다.
발을 헛디뎌 삐끗하면 안으로 떨어지고, 용케 균형을 유지하면 바깥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간다.
범죄에 있어 우리는 주변인이자 경계인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악연'에서 신경외과 의사 이주연(신민아)은 분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박재영이라는 이름의 화상 환자(박해수)가 병원에 오면서 노심초사한다.
그는 학창 시절 같은 이름의 선배에게 성범죄를 당했다.
정황상 당사자라고 생각해 사과를 요구한다.
박재영이 뻔뻔한 얼굴로 알아보지 못하자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한다.
범죄자 상당수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받거나 실망한 이들이다.
상처와 소외가 범죄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주연 같은 성범죄 피해자는 이런 위험에 더 취약하다.
마음에 내재한 상처와 응고한 분노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어두운 자아가 현실 세계로 뛰쳐나올 수 있다.
지난 9일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에서 만난 신민아는 "고통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 피를 묻히는 거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주연은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버텨온 인물이다.
고통은 그대로인데 스스로 감춰왔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해자가 나타난다면 운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복잡한 생각 속에서 자신을 범죄로 몰아세울 수 있다.
실제로 연기하며 그런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막연함도 함께 찾아오더라.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

이주연은 의식을 잃은 박재영 앞에서 살기 깃든 메스를 내려놓는다.
울분을 토해내며 "이 얼굴을 기억할게"라고 말한다.
그는 이름을 기억해 트라우마가 발현됐다.
얼굴은 또 다른 트라우마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앞에 붙은 '이'는 다양한 뜻을 내포한다.
신민아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라서 가장 신경 써서 연기했다"고 밝혔다.
"박재영을 죽여도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을 전환한다고 해석했다.
상대의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얼굴이 불안장애를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봤다.
화상까지 입은 얼굴이라 남은 삶이 고통스럽겠다는 확신도 있겠다 싶었다.
아마 이렇게 풀어서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겪은 고통이 떠오를 때마다 너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하며 이겨내겠다.
'"
이런 선택의 상황이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주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당수가 충분한 치유 없이 정서적 상처를 내면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렇게 부정적 자아는 부정적 정서의 싹을 먹고 자라난다.
이를 부인하거나 자신의 정서와 무의식의 추동(推動)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지 않으면 자칫 파멸을 맞을 수 있다.
그 과정을 상상하고 고민해 연기했다는 신민아는 이주연에게서 희망의 끈을 찾기를 조심스레 바랐다.

"그분들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나. 거울에서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연기만으로도 고통스럽더라. 이주연처럼 부정적 정서의 골에 깊이 빠지는 걸 경계해야겠더라.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보다 주변의 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온기를 얻길 희망한다.
좋은 인연을 맺으며."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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