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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야구·기독교·애국심…100년 전 선교사가 조선에 전한 것들


올해는 한국기독교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85년 4월5일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에서 각각 공식 파송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당시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 신문물과 의술이 전파됐고, 신분 차별 없는 평등 교육이 이뤄졌으며, 그들이 세운 교회는 신앙심과 더불어 애국심을 고취해 신사참배 반대,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교회총연합회는 지난 24~25일 군산, 강경, 공주에서 근대문화유산 탐방을 진행했다.



조선에 처음 자전거를 소개한 건 호남 지역 최초 선교사인 윌리엄 전킨(한국명 전위렴·1865~1908)이다.
1895년 의료선교사 알렉산드로 드루(유대모·1859~1926)와 함께 군산에 상륙한 전킨은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웠다.
당시 그가 가져온 ‘램블러 자전거’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자전거로 전해진다.


국내에 처음 야구가 소개된 것 역시 전킨이 세운 군산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를 통해서다.
군산 영명학교는 전킨이 1903년 설립한 학교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과학, 역사, 지리, 음악, 미술 등을 두루 가르쳤다.
야구는 당시 체육활동 때 소개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전통은 군산에 야구 붐을 일으켰는데, 훗날 1972년 7월 고교야구 결승전에서 부산고에 4대1로 뒤지던 군산상고가 9회 말 공격에서 5대 4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란 애칭을 낳았다.
당시 경기는 ‘자! 지금부터야’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군산에는 지금도 야구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군산 영명학교는 3·5 만세운동을 일으킨 주축이었다.
1919년 2월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근무하던 김병수(1898~ 1951)는 민족 대표 33인 중 한명인 이갑성(1889~1981)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2월20일 군산에서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1883~1944)를 만나 거사를 계획했다.
3·5 만세운동은 호남 지역 최초 만세운동으로, 영명학교 운동장에서 교사와 학생 50명으로 시작된 만세운동 참여 인원은 500여명까지 늘었다고 한다.



당시 전킨의 여동생 윌리엄 불 선교사에 따르면 당시 군산 영명학교 교사였던 문용기(1878~1919)는 1000여명이 참여한 4·4 익산 만세운동을 이끌다 일본 헌병에 양손이 잘려 순국했다.
태극기를 흔들던 오른손이 잘리자, 태극기를 집어 왼손으로 흔들었고, 왼손마저 잘리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가슴에 칼을 맞고 숨을 거뒀다고 불은 증언했다.
영명학교 후신인 군산제일고등학교는 이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전라북도교육청 역사관 조성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전시관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예정이다.



조선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서 전 한국교회에 큰 울림을 전했다.
1896년 2월9일 에드워드 폴링 선교사(1864~1960)에 의해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 ‘ㄱ’자(남녀 자리 구분) 형태로 세워진 강경침례교회는 교회 재산을 일제에 빼앗기고, 해산까지 당하며 신사참배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일제는 1943년 5월 침례교 교단인 동아기독교회 교단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분위기는 인근 교회에도 전해졌다.
강경성결교회에 출석하던 김복희 강경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 62명은 1924년10월11일 신사참배를 거부해 해고·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는 신앙과 애국을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초의 사건으로, 신사참배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일제의 계획을 다소 지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경 지역 내 교회는 반일에 이어 반공에도 앞장섰다.
강경포구는 원산포구와 함께 조선의 양대 포구였고, 강경 시장은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통할 정도로 외부 교류가 많고 개방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개신교가 뿌리내리기도 좋았지만, 6·25 전쟁 당시 이념 대립이 극심해 북한군에 의한 기독교인의 피해가 컸다.
강경성결교회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병촌성결교회는 1950년 9월27~28일 66명의 성도가 북한군에 목숨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
기독교가 공산주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에 불응한 성인 35명, 어린이와 유아 31명이 살해당했다.
교회 옆 기념관에는 당시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기억의 장소가 마련됐다.



1904년부터 남편 로버트 샤프(1872∼1906) 선교사와 공주 영명학교를 운영한 앨리스 해먼드 샤프(사애리시·1871∼1972) 선교사는 어린 시절 유관순을 각별하게 보살폈다.
1914년 13세 나이로 이듬해까지 영명학교에서 공부했던 유관순은 사애리시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비교적 최근 영명학교 재학 당시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발굴돼 유관순 열사가 출석했던 공주 제일교회에 전시됐다.
단체 사진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급우이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이상화 시인의 아내인 서은순 양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140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국 땅을 밟은 외국 선교사와 가족의 수는 6000여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약 600명이 한국 땅에 묻혔지만, 관리 소홀로 유실되거나 정확한 매장지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군산 영명학교를 세운 전킨 선교사 부부와 풍토병으로 숨진 세 아들의 묘는 관리 소홀로 정확한 매장 위치를 찾지 못하고 방치되다, 2022년 서종표 군산중동교회 담임목사의 재정지원으로 전킨이 설립한 군산 구암동의 구암교회 인근에 가묘를 마련했다.
궁멀은 군산 구암동의 옛 지명으로, 전킨은 생전 “나는 궁멀 전씨다.
내가 죽으면 궁멀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전 한교총 대표회장인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는 “전킨 선교사님 유해가 군산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은 분명하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며 “이건 한국교회 모두의 책임이다.
100년 전 이 땅을 찾은 선교사님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최선의 더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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