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내가 나아갈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
‘링반데룽(Ringwanderung)’이라는 말이 있다.
산속에서 짙은 안개나 눈보라를 만났을 때,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에서 맴도는 현상을 뜻한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조난자가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서른 살의 청춘도 때때로 길을 잃는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정진아의 신작 ‘이별할 땐 문어’는 방향을 잃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한 젊은이의 방황을 그려낸다.
작품은 주인공 ‘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수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화성으로 떠나버린 남자친구 ‘태’, 다른 수족관으로 팔려 갈 운명의 대왕문어 ‘덜로리스’, 그리고 130㎢ 소용돌이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려 ‘실종, 사망 추정’ 상태가 된 아버지까지. 로는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떠나보내며 혼자 남은 불안과 상실감 속에서 헤맨다.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별은 반복된다.
남겨진 자의 슬픔과 정체된 삶의 무게는 로의 서른을 짓누르고 괴롭힌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로는 끝없이 자문하지만, 그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어릴 적 꿈꿨던 미래와 현재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고, 속물로 변해버린 단짝 친구 ‘윤희’는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투명한 수족관의 미래와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까지 덮쳐 그녀를 옭아맨다.
하지만 소설은 단순히 상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B와 D사이에는 언제나 C가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삶은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존재하는 ‘선택(Choice)’의 연속이다.
떠나가는 이들을 원망하고 남겨졌다는 불안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로는 결국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을 한다.
우리는 이별이 반복될수록 익숙해질 것이라 착각하지만, 이별은 매번 새롭고 낯설며 또 아프다.
로에게 이별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들어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이다.
작품은 사랑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기대했던 순간들이 부서질 때, 다시 일어서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다.
"몇 년 전 사랑니를 뽑은 자리와 어금니 뒤쪽 사이에 낀 배 조각처럼" 과거는 아프지만 결국 빼내야 하는 것,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마주해야 하는 현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작가는 모래가 낀 듯 목이 깔깔해지는 순간들을 꽤나 의연하게 읊조리며 이별과 상실의 순간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냈다.
이별이 필연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로는 그 해답을 찾는 여정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건넨다.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 낯선 길 위에 남겨진 기분이 드는 이들에게 정진아의 웅숭깊은 문장들을 추천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로와 함께 조금 더 단단해지며 다시금 ‘봄날처럼 따뜻해질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별할 땐 문어 | 정진아 지음 | 김지현 옮김 | 복복서가 | 406쪽 | 1만8000원
어강비 기자 uhkb8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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