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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모금]모텔 입실 10분 만에 '문이 열렸습니다'
아시아경제 기사제공: 2023-09-19 09:00:00
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7년 차 모텔 운영자다.
온갖 경험으로 단련됐으나 입실 10분 만에 고객이 나오면 여전히 긴장된다.
어떤 이유로 객실 교환 및 환불을 요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방에서 담배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고? 흡연 객실인데...너무 춥다고? 한겨울에 창문을 열면 추운 게 당연한데...물론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간혹 얼굴 가득 나른한 미소를 띤 연인의 퇴실일 때도 있다.
머무는 시간이 10분이면 어떻고, 1시간이면 어떠하랴. 저자는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아이 러브 모텔'은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내가 모텔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나와 러브모텔이란 뜻이기도 하다.
서툴지만 애정을 갖고 모텔을 가꾸는 저자의 고군분투와 누군가의 사랑 앞에 풍경으로 자리하며 낮은 자세로 주워 담은 이야기를 전한다.



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빳빳한 지폐 한 장을 나에게 던지며, 여자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을 살며시 잡아끈다.
참 희한하다.
사랑하는 이 앞에 데려다놓는 것은 발이 하는 일인데, 사랑은 죄다 손이 차지하는 걸 보면. 손을 잡고, 손으로 그 사람을 어루만지고, 손등에 키스한다.
- 「욕망은 소중하니까」 중에서


열이 계속 오르지만 집에는 얘기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 시간에도 만두는 혼자 객실 화장실 바닥을 벅벅 닦고 있을 터였다.
제주도에 재주 부리러 왔는데 여기는 제주인가, 죄주인가?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돌아갈 수 있을까? 모텔을 운영하고 나서부터 나에겐 내 작업을 할 틈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글을 쓰기 위한 나만의 방. 가게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가게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 「제주-재주-죄주」 중에서


우리는 한참을 고민했다.
만약 임대를 놓으면 월세 매출은, 적어도 리모델링 전 모텔 매출의 약 두 배인 천만 원 정도가 될 터였다.
하지만 기껏 돈 들여 리모델링한 가게를 그대로 내놓으면 건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사업을 접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돌파구였지 비상구가 아니었다.
- 「모텔은 분위기죠」 중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만두는 무사히 프런트에서 그들을 응대했고, 그뒤로도 몇 번씩 찾아온 그녀를 나는 애써 외면했다.
외면하는 것은 최소한의 배려고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선의였다.
구겨진 구석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곪은 것이 있다면 터뜨려야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뭐라고 그녀를 판단하나.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해 흐르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고객의 내밀한 사정은 모르는 것이 약이다.
- 「프런트에서 마주친 학부모」 중에서


유희에게 706호 키를 건네는 나는 도대체 뭐가 옳은 건지 혼란스럽다.
유희의 친구니까 그녀의 사랑을 지켜주는 것이 도리인지, 그녀가 가정을 지킬 수 있도록 냉정하게 대하는 것이 답인지 말이다.
그러나 불륜을 쉬쉬하며 숨기는 법조차 모를 만큼, 그래서 친구의 가게로 불륜 상대를 데리고 올 만큼 그녀의 사랑은 순수했기에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사랑이 이렇게 잔인하다.
모든 걸 줄 것처럼 쏟아지더니 모든 걸 빼앗아간다.
- 「이곳의 사랑은 생각보다 잔혹하다」 중에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텔 방에서 처음 만난 날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다.
그 사랑은 충동적이고 본능적이었지만 수치스러운 비밀이 아니었다.
우리는 간절히 바라왔기에 저 먼 우주로부터 여기까지 운명이라는 강렬한 별의 빛줄기를 타고 내려온 서로였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시작될 아주 긴 사랑 이야기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우리는 만남의 첫날에 모텔에서 잤고, 그 김에 결혼을 했으며, 지금은 모텔을 운영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모텔은 궁전이 아닐까? 그래, 먼 우주의 양 끝단에서 출발해 우리는 결국 도착했다.
우주의 중심인 이곳, 사랑이 시작되는 곳. 모텔이 아닌 우주의 궁전으로! 그래서 우리에게 모텔의 의미는 특별하다.
- 「사람들에게 모텔이란 무엇일까요?」 중에서


남자가 지하철에 올라탄다.
잠시 후 다음 역에서 여자가 지하철을 탄다.
둘은 잠시나마 같은 칸에 머물며 호흡한다.
그렇게 함께 욕망이라는 역을 지난다.
남자는 다음 역에서 내린다.
여자는 남자가 내린 그다음 역에서 내린다.
두 사람에게 지하철은 스치듯 닿은 장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지하철 요금을 받으면 그만이다.
- 「나는야 모텔 프로파일러」 중에서


아이 러브 모텔 | 백은정 지음 | 달 | 368쪽 | 1만7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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