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단풍 아래 쉬어 가는 시간
‘공간과 여백’ 안견의 산수화
사계절 모습 여덟 개로 그린 ‘사시팔경도’
능수능란한 필획과 농담으로 풍경들 담아
계절은 개념 아닌 시간의 흐름으로 다가와
‘점과 선의 여유’ 정선의 산수화
‘웅장한 포치·구도의 밀색’ 장기는 내려놓고
산머리·인물 등 점과 가는 선 묘사 ‘풍림정거’
느긋하게 즐기는 가을 정취 멋스럽게 보여줘
#안견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현동자(玄洞子) 안견은 조선 초기 세종조의 가장 뛰어난 화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화원의 신분이 높지 않았기에 개인적 생애와 관련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기록을 기반한 다수의 연구가 충남 서산에서 1400년 전후로 출생해 1470년대에도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 활동은 도화서 화원 시절부터 전해진다.
세상을 떠난 이후 16세기에는 ‘안견파’가 탄생할 정도로 조선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회화사의 삼대가(三大家)로 신라의 솔거, 고려의 이녕과 함께 일컬어진다.
 | | 안견의 ‘사시팔경도’ 중 늦여름을 그린 ‘만하(晩夏)’.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안견이 화원이 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일찍부터 최고 화원으로 꼽혔다.
당대 영향력 있는 문신이었던 신숙주가 시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에서 안평대군의 소장품을 논하며 안견을 언급하기도 했다.
조선에 안견이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는데 못 그리는 것이 없다는 내용이다.
그는 안견이 대가들의 작품에서 좋은 점을 수집, 절충해 필적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린다고 평가했다.
특히 산수화를 잘 그린다고 칭송하며 안평대군의 소장품 중 안견의 작품이 가장 많다고 썼다.
‘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산수도(山水圖)’, ‘팔경도(八景圖)’ 등 구체적으로 소장한 작품명을 나열하기도 했다.
안견은 앞서 언급했듯 대가들의 그림을 자주 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배울 점을 스스로 찾고 작품에 적용해 발전시킨 듯한데 중국 송대의 북종화를 수용한 모습이 감지된다.
그 가운데 산수화 양식을 통일한 곽희(郭熙)의 영향이 크게 드러난다.
곽희는 살아생전 산수화론서인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썼는데 산수화와 관련해 쓴 ‘산수훈(山水訓)’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산수훈’에 따르면 산수화에는 ‘의경(意境)’, 즉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사물과 대상을 만나 생성하는 의미와 형상이 있어야 한다.
산을 그릴 때도 그것을 근경과 원경에서 모두 살피고 날이 흐릴 때도 맑을 때도 모두 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산의 다양한 변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연상을 부여해야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는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 가운데 곽희의 가르침을 이상적으로 구현해 보이는 작품이다.
여기 여러 개의 작은 화면이 펼쳐져 있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계절의 모습이 네 개가 아닌 여덟 개로 그려졌다.
초봄, 늦봄, 초여름, 늦여름, 초가을, 늦가을, 초겨울, 늦겨울이 포착되어 있다.
그래서 여덟 개의 그림을 가만히 살피다 보면 계절은 개념적이거나 상징적이기보다 시간 속 한순간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자연스러운 흐름의 목도 속에 우주적인 질서와 이치를 깨닫게도 한다.
각각의 화면은 그맘때쯤의 풍경과 느낌을 담아내려 계절의 특성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늦여름을 그린 ‘만하(晩夏)’에는 화면 우측 나귀를 이끌고 다리를 건너는 농부가 도롱이를 걸친 것으로 보아 비가 온다.
나무는 물론이고 바위산까지 오른쪽으로 휘어졌을 정도로 바람도 강력하게 분다.
늦여름은 세차게 비바람 부는 장마의 모습으로 보는 이에게 전해진다.
‘초동(初冬)’에서는 ‘만하’가 물에 번진 듯 그려진 것과 달리 건조함에 선명해진 풍경을 표현했다.
안견은 계절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려 필법과 묵법을 화면마다 달리하기도 했다.
굵고 가는 필획, 짙고 옅은 농담의 능숙한 사용을 보고 있으면 그의 필력이 체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안견파 화풍의 한 전형을 드러내기도 한다.
화면의 한쪽으로 구도가 치우쳤는데 안휘준 미술사가는 이를 ‘편파구도(偏頗構圖)’라고 불렀다.
경물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갖지만 수면, 안개 등을 따라 전개해 통일된 느낌을 준다.
더불어, 공간과 여백이 확산하는데 이 또한 안견파 산수화의 큰 특징이다.
 | | 안견의 ‘사시팔경도’ 중 초겨울을 그린 ‘초동(初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정선이 그린 가을날의 풍경
안견이 조선 초기 중국 당송의 북종화를 수용해 사의산수화를 그렸다면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은 조선 후기 남종화를 받아들여 한국적 진경산수화를 창출해냈다.
정선의 작품은 앞선 연재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데 ‘인왕제색도’ 등 걸작을 다수 남겼으며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천원 권 지폐 뒷면에 그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담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정선은 1676년 한양 유란동 난곡에서 유학 정시익과 밀양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에 부친이 사망하며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가 되었으나 그림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30대 중반부터는 금강산을 그린 작품이 알려지며 진경산수화에 뛰어난 문인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41세에 첫 벼슬에 오른 이후 조지서 별제, 사헌부 감찰, 하양현감, 의금부 도사, 종친부 전부, 사도시 첨정 등을 거쳤다.
문인 관료로 활동하는 가운데 그는 다양한 지역의 풍경을 만나고 조선의 진경산수화를 완성해냈다.
‘풍림정거(楓林停車)’는 정선이 단풍나무 숲에서 수레를 멈춘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풍림정거’는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의 시 ‘산행(山行)’의 다음 구절들을 시각화하며 그렸던 그림이다.
“멀리 차가운 산을 오르니 돌길은 경사진데 / 흰 구름 피는 곳에 사람 사는 집이 있네 / 수레를 멈추고 늦은 단풍 숲을 즐기니 / 서리 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네(遠上寒山石徑斜白雲生處有人家停車坐愛楓林晩霜葉紅於二月花)’. 산은 꽃으로 봄에만 피는 것 같지만 차가워진 가을의 공기 속에도 붉게 색으로 핀다.
여기 마주한 산들의 마루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산의 풍경이 있다.
침엽수 사이 물든 나무들을 지나면 한 동자가 끌고 온 수레를 멈추고 가만히 서 있다.
동자의 시선을 따라가면 벼랑 같은 언덕 끝에 선비가 신선처럼 앉아 눈 아래 풍경을 내려다본다.
동자와 선비 외에 아무도 없는 그곳은 고요하고 여유로워 방해 없이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 | 정선의 ‘풍림정거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정선은 느긋하게 가을을 즐기는 이 장면에서 풍경을 간략하게 그렸다.
산머리가 멀리 보이는 산은 몇 개의 선과 점으로 채웠다.
그 가운데 수레와 인물의 형상을 가는 선으로 묘사한 것이 눈에 띈다.
정선과 함께 그림을 논했던 조영석은 정선의 그림을 두고 “일필휘세, 필력의 웅혼, 기세의 유동, 웅장한 포치, 구도의 밀색”이라고 했다.
‘인왕제색도’는 이러한 장기를 잘 드러내는데 여유가 전해지는 이 장면에서는 단순한 표현이 더 어울린다.
치열했던 여름이 지난다.
여느 때보다 더웠고 많은 비가 내렸다.
뉴스 속 사건이 타인의 것일 때도 있지만 이번엔 모두의 것이었다.
메타세쿼이아가 이어진 집 근처 도로는 어느새 은행색을 띠기 시작했다.
가을은 여유로울 수 있을까? 사계절을 담은 안견의 산수화를 보면 시간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며 찰나는 끝도 없이 모여 영원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레를 멈추고 단풍을 구경하는 정선의 그림 구석구석을 살피니 내일이라는 찰나가 눈앞에 있는 것 같다.
희망으로 꿈꿔볼 법한 시간이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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