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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헌트③]제2의 전성기, 노력과 인내의 소산
아시아경제 기사제공: 2022-08-12 14:00:00

이정재는 즉흥적 표현과는 거리가 먼 배우다.
동작 하나하나를 계산하고 빈틈마다 아이디어를 채워 넣는다.
지금도 사람들 입살에 오르내리는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관상)", "거 중구형,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신세계)" 등의 연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작은 소품까지 일일이 챙길 만큼 준비성이 철저하다.
꼼꼼한 성격을 아는 몇몇 영화인들은 그가 ‘헌트’를 연출한다고 밝히자 한사코 만류했다.
집중하는 범위가 넓어져 신경 쇠약에 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각본은 ‘해피 엔드’ 정지우, ‘관상’ 한재림, ‘아수라’ 김성수 등 유명 감독들이 고사한 ‘남산.’ 이정재는 한재림 감독이 연출하면 출연할 생각이었다.
각본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제작은 차일피일 미뤄지더니 무산돼버렸다.
이정재는 1~2년을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새 주인을 찾던 각본을 손에 넣었다.
"왜 감독님들이 포기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잘만 손보면 괜찮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막연한 기대를 품고 판권을 사들였죠. 그게 고생길인지도 모르고(웃음)."


‘남산’은 박평호 중심의 첩보 스릴러. ‘헌트’는 맞수인 김정도를 대등하게 조명해 이야기가 한층 더 깊다.
이정재는 그럴싸해 보이는 상황을 창작하는 데 3년을 투자했다.
단순히 개연성을 메우거나 반전만 설계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이라는 씨줄에 인간 군상을 날줄로 엮어냈다.
액션으로 배역의 심리를 나타내는 독특한 도전도 감행했다.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서 대통령 테러를 진압하는 첫 시퀀스에서 김정도는 테러범을 진압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사건 전후로 옅게 긴장과 초조를 드러낸다.
이유는 후반부에 명확히 제시된다.
각각의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연기 폭을 넓힌 것이다.
이정재는 "타당한 명분이 명확하게 있어야 설득력도 높아지고 배우들도 힘을 받아 연기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각본만 잘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더라고요. 배우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상상력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연출했어요. 단순한 동선이나 대사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죠. 스스로 적절한 느낌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줬어요. 경험상 자연스러운 설정이 수반돼야 좋은 연기가 나오더라고요. 촬영하는 장소를 실제처럼 꾸미고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도 못잖게 중요하고요."


오랜 경험에서 얻은 연출 철학이다.
이정재는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만 해도 촬영장은 욕설이 난무하고 물병이 날아드는 일이 흔했다.
감독들이 사나운 눈초리로 연기를 지적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이정재는 불상사를 피하려고 매사 자기 몫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사전에 제작진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연기를 배워 나갔다.
‘헌트’는 그렇게 자양분을 흡수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정재는 "메가폰을 잡으면서 그동안 함께 했던 감독들의 열정이 많이 떠올랐어요"라고 말했다.
"‘젊은 남자’로 만났던 배창호 감독님께 가장 많이 배웠죠. 직접 몸을 구르면서 연기를 알려주셨어요. 매번 촬영장에 일찍 나오셔서 작은 소품까지 꼼꼼히 챙기셨죠. 막내 스태프까지 챙기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무게중심을 잡아주면 제작진 모두가 즐기면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철두철미한 직업정신이 매번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이정재는 30대를 맞으면서 부침에 시달렸다.
2008년 ‘1724 기방난동사건’부터 출연작들이 번번이 흥행에 실패해 출연 제의가 뚝 끊겼다.
상대 배우가 호흡을 맞추기를 거절해 하차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촬영장을 등한시하고 실내장식 등 다른 분야로의 도전을 염두에 뒀다.
마음을 고쳐먹은 건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에 출연하면서부터다.
목소리 톤에 변화를 주고 다른 배우들이 기피하는 악역을 자처하는 등 도전적 자세로 삶 전체를 재무장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맞은 전성기는 그런 노력과 인내의 소산과 같다.


"언제까지 청춘스타일 수는 없잖아요. 성인 연기를 하게 되는 시점에 거의 모든 배우가 겪는 문제였던 것 같아요. 젊은 배역을 맡기기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선이 굵은 역할을 맡기자니 젊고. 애매한 위치에서 갈등을 겪었던 거죠. 그렇게 오지도 않는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니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어느 순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마음으로 꾸준히 달려온 듯해요. ‘오징어 게임’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들 하지만 인생은 결코 한 가지 요인으로 바뀌지 않아요. 오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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