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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엽서·담뱃갑에 꾹꾹 눌러 새긴… 가족 향한 그리움
세계일보 기사제공: 2022-08-11 19:35:28
이건희 컬렉션으로 보는 이중섭
국립현대미술관 작품 90점 전시
아내와 연인시절 주고 받은 엽서
소통 수단 넘어 하나의 작품으로
가족과 재회 열망 담은 은지화 등
작은 그림들 ‘시대의 자화상’ 남아
‘닭과 병아리’ 등 첫 공개작 눈길


“나는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오.”

이중섭은 1954년 아내에게 부친 편지에서 이렇게 다짐했지만, 이후 채 3년을 살지 못한다.
1956년 9월 6일, 영양실조와 분열 증세를 보이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끝에 무연고자 신분 4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직하는 날까지 그는 가족을 평생 사랑하고 그리워했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로 마치는 그의 편지는 그 어떤 작품보다 정성스레 꾸며졌다.
편지지 상단에는 가족 구성원 숫자를 의미하듯 별 네개를 그렸고 그 옆으로는 해와 초승달이 떠 있다.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아내를 향한 애절한 문장들 주변으로, 콧수염이 나고 얼굴이 긴 자신을 그렸다.
풍성하고 동그랗게 앞머리를 만 아내와 두 아들이 얼굴을 맞대고 껴안은 채 웃고 있다.
종이와 붓, 팔레트도 등장한다.
붓을 든 콧수염 사내가 행복한 얼굴로 가족을 그리는 모습도 그렸다.
훗날 이중섭 작품세계의 핵심적인 도상으로 꼽히는 요소들이 이 작은 편지지 안에 모두 그려져 있는 셈이다.
편지는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아내에게 바치는 한편의 그림 작품이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이중섭’이 12일 시작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중 이중섭 작품 수는 총 104점. 이 가운데 국내외 다른 전시에 대여된 작품을 제외한 약 80점이 이번 전시에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존에 소장하고 있던 10점을 더해 약 90점으로 이번 전시가 구성됐다.
‘가족을 그리는 화가’
◆귀한 1940년대 엽서화 대거 전시

특히 이건희컬렉션을 통해 1940년대 제작된 엽서화 40점이 대거 기증돼 이번 전시에 36점이 나왔다.
아내와 두 아들 이름을 적어 편지와 함께 접어 동봉해 보냈던 편지화도 이번 전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의사소통을 넘어 작품으로 남게 된 조그만 그림들이 이번 전시 주인공인 셈이다.

이중섭은 일제강점기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8세 때 평양 외가로 이주해 보통학교에 입학해 동기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 작업실을 출입하며 각종 화구와 ‘더 스튜디오(The Studio)’ 같은 유명 미술서적을 접하고 큰 자극을 받았다.
16세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 임용련에게 미술교육을 받았고 17세부터 20세 때까지 학생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잇따라 입선했다.
20대 일본 유학 시절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23세에 일본 도쿄문화학원에 입학해 자유로운 교풍 속에서 화가로 성장하던 중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 것이다.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고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덕이란 이름을 지어 불렀다.
1948년, 1949년 두 아들 태현, 태성을 얻었다.

엽서화는 그가 1940년 연인이던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것에서 시작됐다.
가로 14㎝ 세로 9㎝ 관제엽서에 가벼운 채색을 곁들이며 사랑을 담았다.
엽서화는 현재까지 총 88점이 남아있다고 파악된다.
1940년 첫 엽서화 1점, 1941년 75점, 1942년 9점, 1943년 3점이다.
엽서화는 이중섭이 세상을 떠나고 23년 뒤인 1979년에 미도파백화점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작품전’에서 처음 소개됐다.

우현정 학예사는 “엽서화는 자유로운 공간 구성, 단순화한 형태, 원색 사용, 정제된 선묘 등 1950년대 완성된 이중섭 작품의 특징을 선취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깊다”고 설명했다.
‘여인’
◆펼치지 못한 꿈의 상징 은지화

이중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은지화는 이건희컬렉션을 통해 총 27점이 기증됐다.
이번 전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조그만 은지화들을 대거 모아 놓아 은은하고 귀하게 반짝이는 전시장 풍경은 이채롭고 감격적이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이중섭 일생은 일제강점과 해방, 전쟁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민족사 가장 아픈 시기를 살아낸 그의 일생에서 은지화는 짧은 행복과 절망의 중간, 희망을 꼭 움켜쥐고 있었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195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경상남도 부산으로 월남하고 다시 부산항에서 제주로, 또 제주항에서 서귀포로 걸어 피란했다.
아내, 두 아들과 살을 비비고 생활한 기간은 서귀포 알자리 동산마을 이장님 댁 곁방 한칸을 얻어 지낸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단 1년. 이중섭은 이때를 평생 그리워했다.

이후 아내와 아이들이 일본으로 먼저 떠난 뒤 혼자가 된 이중섭이 재회할 날을 기다리며 집중적으로 그린 것이 은지화다.
담뱃갑 속 은박지에 못이나 철필로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꾹꾹 눌러 파내듯 윤곽선을 그리고, 그 위에 먹물이나 갈색 물감, 담뱃재를 바른 뒤 다시 헝겊으로 닦아내는 그림이다.
고려청자 상감 기법처럼 윤곽선에만 진한 색이 남고 은박지는 표면은 반짝이며 닦여 그림이 완성된다.
1953년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가족과 재회했던 이중섭은 그간 그린 은지화 70점 뭉치를 아내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대작으로 그릴 에스키스(스케치)이니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말고 갖고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은지화는 끝내 대작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1956년 외국인 소장가에 의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은지
‘닭과 병아리’
화 3점이 기증됐을 때 기법과 재료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소장품이 됐다.

◆최초 공개 작품·희귀작도 주목

이번 전시에는 문헌으로만 전해지다가 실물로는 최초 공개되는 작품 두 점이 있다.
1950년대 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닭과 병아리’, ‘물놀이 하는 아이들’이다.
언제부터 이건희 회장이 소장한 것인지, 누구의 손을 거쳐갔는지, 그간 왜 전시에 한번도 나온 적이 없는지는 학예사도 “현재로선 알 수 없다”고 했다.
1942년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작품 ‘소와 여인’은 초기 희귀작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이중섭과 가족은 1950년 부산으로 피란하면서 그림들을 챙겨 들고 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40년대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소와 여인’은 이중섭의 “초기 작품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편지지에 장식한 그림, 엽를 채운 그림, 다방과 술집, 길거리, 쓰레기통에서 모은 담뱃갑 속 은지 위에 그린 그림. 그가 남긴 작품들엔 대작이 보이지 않는다.
온전한 바탕에 그린 것도 적다.
깨끗한 도화지나 커다란 캔버스를 설령 구할 수 있었다 해도, 그 온전한 흰 바탕이 그 시대 정직한 화가들에게는 죄책감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생존에 모든 힘을 쏟는 와중에 남겨진 공간을 감사히 여기며 그림으로 채웠고, 버려진 은박지 구겨짐도 그저 주어진 여건 삼아 그림을 그렸다.
손바닥만 한 그림들로만 채워진 전시장 풍경은 당대 민족 자화상으로 다가온다.
전시장 벽면에는 그를 위로하는 후세의 의식처럼 거대한 디지털 화면에 엽서와 은지화를 확대해 보여주는 영상이 띄워졌다.
내년 4월23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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