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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잇수다]판잣집의 빛과 그림자
아시아경제 기사제공: 2022-08-10 15:29:58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 빛이 반짝이고 창문 틈으로 알전구가 밝힌 빛이 새어 나온다.
어스름밤, 작은 빛들이 모여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집 사이를 밝히는 풍경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 어쩌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장이 김불이의 큰아들 영호가 식구들과 꿈꾸던 ‘천국’의 조각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정영주 작가의 작품 속 달동네 풍경엔 지옥을 딛고 천국을 그리는 이들을 위로하는 작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빈민들이 살던 초가집이나 토막집은 존재했지만, 본격적으로 판자촌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다.
일본의 무자비한 수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시골의 빈농들이 생존을 위해 서울로 모여들면서 사대문 외곽 용두정, 아현정, 이촌정 등에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남쪽으로 이주한 월남민 숫자가 폭증하면서 판자촌이 확대되자 정부는 강제 철거에 돌입한다.


이 시절 판자촌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이응노 화백의 ‘판자촌(1953)’엔 담 없는 집과 집 사이 골목마다 장독대와 수레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옆으로 쭈그리고 앉아 솥에 불을 지피며 가족들의 밥상을 준비하는 아낙네의 모습에선 고단한 삶 속 하루하루를 버텨낸 당시 판자촌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계속되는 철거에도 1960년대 이농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도시의 판자촌은 더 늘어만 갔다.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로도 잘 알려진 이만익 화백의 1968년 작 ‘러시아영사관 유적지 풍경’에는 빼곡이 들어선 당시 판자촌 사이로 우뚝 선 영사관 탑 모습이 이질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2년 뒤인 1970년 같은 장소를 화폭에 담은 작가의 ‘러시아영사관 유적지 풍경 2’에는 황토빛 나대지가 된 같은 공간을 응시하는 한복차림의 여인과 어린이가 서 있다.


1969년 6월 서울시는 화폭 속 공간인 정동 판자촌에 자리 잡은 550동의 건물을 대대적으로 철거했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2645명의 정동 판자촌 주민들은 서울시청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고 경찰과의 투석전과 최루탄 진압 등으로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화백이 담은 캔버스 속 폐허는 집을 잃은 철거민들의 상실감을 담은 풍경이었다.
1969년 서울시 전체주택 수는 54만3645호, 판자집 수는 18만1000호로 서울시 세 가구 중 한 곳은 판잣집인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큰 판자촌은 청계천에 있었다.
1971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광주대단지사건은 이 지역의 철거민들이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약속받은 집과 일자리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자 열악한 환경에 내몰린 분노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폭동이었다.


그 시절의 상처는 곧 잊혔지만, 지금도 그 풍경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 있는 청계천 박물관에 재현된 체험관을 찾아 당시를 추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를 겪으면서 꿈을 쫓아 서울로 올라온 이들의 터전이 된 판잣집은 이제 박제된 모습으로 대중에게 기억되고 있다.
지옥에 살며 천국을 꿈꾸던 그들의 삶은 지금 어디쯤에 가닿아 있을까.


편집자주예잇수다(藝It수다)는 예술에 대한 수다의 줄임말로 음악·미술·공연 등 예술 전반의 이슈와 트렌드를 주제로 한 칼럼입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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