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 꿈꾸다 히트 작곡가 된 사연
오랜 꿈으로 다시 펼친 음악 인생
"아직 꿈을 먹고 사는 아재..음악에 열정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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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를 꿈꿨던 유해준 작곡가는 프로듀서로 먼저 활동을 시작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냈다. 최근 싱어송라이터로서의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히트곡들이 나올 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청엔터 |
[더팩트 | 정병근 기자] 유해준을 설명할 때 첫머리에 오는 건 히트 작곡가다. 1997년 '무기여 잘 있거라'를 시작으로 '천상연' '천년의 사랑' '잘가요', 드라마 '겨울연가' OST '처음부터 지금까지', '프라하의 연인' OST '단하나의 사랑' 등을 탄생시키며 일찌감치 성공을 이뤘다. 그 다음 수식은 싱어송라이터다. 순서는 다음이지만 30년 넘게 품은 그의 오랜 꿈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유해준은 가장 바쁜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박상민의 정규 2집 프로듀서로 데뷔해 메가 히트곡 '무기여 잘있거라'와 '애원'을 탄생시켰고 곡 작업 의뢰가 쏟아졌다. 이후 10년여를 쉴 틈 없이 달렸다. 뛰어난 작곡가도 전성기는 길어야 10년이란 말이 있다. 유해준은 활황기를 지나 번아웃이 왔고 동시에 음악 시장도 많이 바뀌었다.
상실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유해준에겐 오히려 이 때가 또 다른 기회였다. 사실 30여년 전 그의 꿈은 작곡가가 아니라 곡을 만들고 직접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이 행복하고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가슴에 늘 한은 있는데 곡만 썼다. 언제가 노래를 하겠다는 열정이 몇십 년 사그라들지 않더라. 히트곡 쏟아낼 때보다 행복하다"는 그다.
시작부터 박상민의 정규 2집 프로듀서를 맡게 됐다면 대부분이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해준에겐 실패의 산물이다. 싱어송라이터의 꿈을 꾸며 데모를 만들어 여러 회사를 찾아다녔지만 늘 퇴짜를 맞아 좌절하던 시기, 데모를 들은 한 회사에서 그 곡들을 박상민의 2집에 넣자고 제안해 성사됐다.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택한 길이었다.
"사실 '무기여 잘있거라'와 '애원' 모두 제가 부르려고 준비한 곡이었어요. 그걸 다른 가수 주자고 하니까 박차고 나왔죠. 그런데 며칠 뒤에 전화가 오더니 이 곡들로 프로듀서를 하고 그 다음에 솔로 앨범을 내준다고 하더라고요. 좌절 속에서 살다가 그런 제안을 받은 거고 이 뒤엔 내 꿈이 있고 약속이 있으니까 기분 좋게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시작됐어요.(웃음)"
이 앨범은 초대박이 났고 유해준은 단숨에 업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작곡가로 떠올랐다. 길을 걷다가도 자신이 만든 곡이 수없이 흘러나오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여학생들이 '무기여 잘있거라' 얘기를 하는 걸 듣고 '그 곡을 만든 게 나야'라고 말하고 싶고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 마음먹은 게 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고생을 잊지 말자"고.
회사도 유해준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완전히는 아니다. 솔로 앨범이 아니라 듀오를 제안한 것. 그게 바로 1998년 데뷔한 캔(Can)이다. 많은 이들이 배기성과 이종원 듀엣으로 기억하지만 1집은 유해준과 이종원이었다. 당시 나온 곡이 지난해 리메이크돼 메가 히트한 '천상연'이다. 유해준이 작사 작곡 프로듀싱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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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준은 히트 작곡가로 지내면서 때론 가창까지 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싱어송라이터로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을 미처 못했다. 그러다 다시 오랜 꿈을 꺼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청엔터 |
"회사에서 말이 조금 달라지더니 듀엣을 하래요.(웃음) 그래도 음악을 하는 게 중요하니까 받아들였죠. 듀엣 곡도 있고 각자 솔로곡도 있는데 녹음을 할 때부터 곡을 바꾸라고 그러더니 활동을 할 때도 저한테만 시큰둥하고 은근히 설움을 주더라고요.(웃음) 도저히 못 하겠어서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그때서야 '사실은' 그러면서 잘 생각했다더라고요."
유해준은 "데뷔하자마자 은퇴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눈 내리는 날 무작정 차를 끌고 춘천 쪽으로 달리면서 펑펑 울었다. 그러다 소백산 어딘가에 다다랐을 즈음 배수로에 바퀴가 빠졌고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한 스님이 산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더니 "좋은 일이 생기시겠습니다"하고 가길래 "좋은 일이 뭘까" 싶었다고.
그 '좋은 일'이 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라고 했지만 유해준은 프로듀서로 승승장구했다. 2000년대 초반 정재욱의 '잘가요', 클릭비의 '백전무패', 한류 드라마로 초대박이 난 '겨울연가'의 주제곡 '처음부터 지금까지' 등 히트곡을 쏟아냈다. 때론 밥먹을 시간도 없어 운전을 하면서 육포나 과자 같은 걸 먹으며 끼니를 해결해야 했을 정도다.
"그땐 쓰는 곡마다 잘 되니까 '신의 손'인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웃음) 곡도 너무 잘 나오고 하루 2~3곡씩 쓰고 한 곡을 쓰면서 다른 곡 멜로디도 떠오르고 그랬어요. 곡자로서 전성기는 2000년대 중반 정도까지였던 거 같아요. 그때 이후엔 번아웃이 오더라고요. 소리 자체가 듣기 싫었어요. 매일 산에 올라가 암자에 앉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죠."
그러던 무렵 '겨울연가'가 국내를 넘어 일본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주제곡을 만든 유해준도 러브콜이 쏟아졌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긴장과 설렘으로 번아웃을 극복하며 일본 일만 맡았다. 당시 가수는 아니었지만 공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급성장하던 K팝을 보면서 일본 일을 접고 돌아왔지만 만만치 않았다.
"힘들었어요. K팝이 아이돌 시장으로 완전히 넘어가면서 발라드가 별로 인기가 없었거든요. OST를 써서 잘 됐던 때가 있었으니까 OST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것도 반응도 없고 매출도 안 나왔어요. 시장이 전체적으로 그랬어요. 그땐 정말 음악 놓고 장사를 해야 하나 싶더라고요. 그때 제작사 대표님이 노래를 권유했고 다시 가수로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그 전인 2005년 방송한 인기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OST '단하나의 사랑'도 유해준이 쓰고 불렀다. 가이드 녹음을 했는데 제작자가 듣고 유해준이 불렀으면 좋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 그때만 해도 곡자로서 매우 바쁘던 시기라 스스로 가수라고 생각도 안 했고 다시 가수로 활동할 여력도 없었다. 또 오래 가창을 내려놔 당장 어렵기도 했다.
그러다 발라드 불황기에 일적으로 여유가 생길 때 가창 제안을 받으니 오래 묻어뒀던 싱어송라이터의 꿈과 열정이 타올랐다. 그때 부른 곡이 2015년 방송한 드라마 '울지 않는 새' OST '미치게 그리워서'다. 이 곡은 몇년이 지나 '역주행'을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최근 가수 황가람이 리메이크해 또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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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준은 "계속 음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한 목표는 없다. 그냥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고 열정적으로 즐기던 사람으로 남고 싶다. 계속 즐기면서 음악을 하고 싶고 제 음악을 듣는 분들도 같이 즐길 수 있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엔터 |
'미치게 그리워서'를 부를 때만 해도 다시 가수를 해야겠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다 '미치게 그리워서'의 인기와 또 다른 인기 드라마 '다함께 차차차' OST '나에게 그대만이'까지 반응이 좋자 "싱어송라이터의 꿈을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가수로서 나온 몇 곡이 잘 됐지만 아마 곡자로서 계속 승승장구했으면 계속 가수를 할 생각을 안 했을 거 같아요. 곡자로서 잘 안 되기 시작하면서 부른 곡이 반응이 오니까 결심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스님이 말했던 '좋은 일이 생기시겠네요'가 이렇게 될 걸 얘기했나 싶기도 하고.(웃음) 그때부터 곡을 써달라고 해도 안 쓰고 제 곡에만 전념했어요."
유해준은 음악을 한 지는 오래 됐지만 '신인 가수'라고 했다. 예전과는 또 다른 마음으로 곡을 열심히 쓰고 노래 연습도 하고 있다. 곡자로서 데뷔작인 박상민의 정규 2집이 대박났을 때 마음먹었던 겸손이 유해준을 여전히 이끌고 있는 셈이다.
"아마 가수를 계속 했으면 타성에 젖어서 지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안 해본 거니까 더 열정을 갖고 계속 할 수 있는 거라고 주변에서도 그러더라고요. 오랫동안 싱어송라이터를 꿈꿔왔고 반응이 없어도 잃을 게 없잖아요. 아직도 꿈을 먹고 사는, 꿈꾸는 '아재'랄까요. 지금은 누가 곡 달라고 하면 써주고 아니면 제가 부르고 그러니까 행복하고 재미있어요."
유해준은 그렇게 새로운 음악 인생을 보내고 있다. 2017년 싱글 '은하수'를 시작으로 '웃어넘겨', '왜 이렇게 난 니가 보고 싶은지', '너 밖에 없는 나', '사랑하기 전에는', '신나는 세상을 위해', '너를 못잊어', '자꾸 생각이 나', '그대 바보', 미니 앨범 '사랑한다', 베스트 앨범 '나에게 그대만이', 드라마 '오월의 청춘' OST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을 발표했다.
음악인으로 활동한 지 30년이 가까워오지만 여전히 "음악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록발라드부터 재즈, 댄스, EDM 등 여러 장르에도 도전하고 싶다.
"계속 음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한 목표는 없어요. 그냥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고 열정적으로 즐기던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음악을 통해서 행복하고 싶고 실제로 행복하고요. 히트곡들이 나올 때보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계속 즐기면서 음악을 하고 싶고 제 음악을 듣는 분들도 같이 즐길 수 있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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