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고 SK그룹 역시 반도체·배터리·에너지 사업에서 거센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위기를 넘어 혁신을 꾀한 고(故) 최종현 SK 선대회장의 경영 기록이 유고 27년 만에 세상에 나온다.
1970~1990년대 한국 경제 도약의 주역이었던 그의 경영 활동이 디지털 기록물로 복원되며, 기업 경영의 지혜를 되새길 중요한 사료로 남게 됐다.

2일 SK는 그룹 수장고에 장기간 보관해 온 최 선대회장의 경영철학과 기업활동 관련 자료를 발굴·디지털로 변환·영구 보존·활용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지난달 말 완료했다고 밝혔다.
SK는 디지털 아카이브의 자료를 그룹 고유의 철학과 수펙스추구 문화 확산 등을 위해 활용할 방침이다.
최 선대회장은 사업 실적·계획 보고, 구성원과 간담회, 각종 회의와 행사 등을 녹음해 원본으로 남겼다.
이를 통해 그룹의 경영 철학과 기법을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기업 경영의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이 같은 방침은 ‘SK 고유의 기록 문화’로 계승됐다.
이번에 복원한 자료는 오디오·비디오 형태로 약 5300건, 문서 3500여 건, 사진 4800여 건 등 총 1만 7620건, 13만 1647점이다.
최 선대회장의 음성 녹취만 오디오 테이프 3530개에 달한다.
이는 하루 8시간을 연속으로 들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만큼 상당한 분량이다.
최 선대회장의 생생한 육성 녹음을 통해 당시 경제 상황과 한국 기업인들의 사업보국에 대한 의지, 크고 작은 위기를 돌파해 온 선대 경영인의 혜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최 선대회장은 1982년 신입 구성원과의 대화를 통해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도 인재라면 외국 사람도 쓰는 마당에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지연, 학연, 파벌을 형성하면 안 된다”라며, 한국의 관계 지상주의를 깨자고 임기 내내 여러 차례 강조한다.
1992년 임원들과 간담회에서는 “연구개발(R&D)을 하는 직원도 시장 관리부터 마케팅까지 해보며, 돈이 모이는 곳, 고객이 찾는 기술을 알아야 R&D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라 실질적인 연구를 주문한다.
같은 해 SKC 임원들과 회의에서는 “플로피디스크(필름 소재의 데이터 저장장치)를 팔면 1달러지만, 그 안에 소프트웨어를 담으면 가치가 20배가 된다”라며 우리나라 산업이 하드웨어 제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 유럽 한 국가의 왕세자 면담을 위해 준비한 보고서에는 앞으로 기후 위기가 심각한 국제문제가 된다며 법정 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환경기준을 맞추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제안이 담겨있다.
SK의 성장 과정도 최 선대회장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계 경제 위기를 몰고 온 1970년대 1, 2차 석유파동 당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최 선대회장이 중동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 석유 공급에 대한 담판을 짓는 내용, 1992년 이동통신사업권을 반납할 때 좌절하는 구성원들을 격려하는 상황 등이 음성 녹취에 담겨있다.
SK 관계자는 “최 선대회장의 경영 기록은 한국 역동기를 이끈 기업가들의 고민과 철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자료”라며, “양이 매우 많고 오래되어 복원이 쉽지 않았지만, 첨단기술 등을 통해 품질을 크게 향상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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