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양재동 본사에서는 워싱턴과 브뤼셀, 서울의 시계가 동시에 돌아간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현대차 본사 사무실 모니터 속에서는 워싱턴 법인의 대관팀이 보고를 시작한다.
"지금 백악관 회의에서 전기차 정책 정보가 나왔습니다.
" 바로 이어 브뤼셀 법인이 말을 받는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도 탄소세 관련 정책 변화가 감지됩니다.
"
글로벌 대관 조직인 GPO(Global Policy Office)에서는 이런 화상회의를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종합하고 본사와 연결해 즉각적인 의사 결정을 진행한다.
정책 변화뿐 아니라 지정학적 긴장 징후, 급격한 현지 기후변화 등 해외 생산시설과 글로벌 영업망에 영향을 주는 정보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GPO 조직은 정의선 회장 직속이다.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성 김 사장을 중심으로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워싱턴과 브뤼셀, 서울을 연결하는 영상회의는 이틀에 한 번씩 열린다.
한때 법률 자문이나 인맥 관리 수준으로 여겨졌던 기업 대관 업무가 이제는 첩보기관처럼 글로벌 이슈를 미리 포착하고 분석해 대응책을 내놓는 ‘정보전’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무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글로벌 정보전이 기업 생존의 필수요소가 됐다.
현대차가 외교관 출신 성 김 사장을 긴급히 영입한 것도 글로벌 정책 협상력을 강화하려는 특단의 조치다.
과거 판·검사 출신의 인력을 선호했던 기업들은 이제 해외 정보전에 능통한 외교관 영입에 사활을 건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해외 대관 업무는 정보 수집과 전략 대응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업 인텔리전스 유닛(Corporate Intelligence Unit)’으로 진화하고 있다.

정보 전쟁으로의 변화는 인재 영입에서 두드러진다.
18일 아시아경제가 김건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2023~2024년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공직자 취업 심사 결과에 따르면 외교부 출신 30여 명이 기업과 법무법인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가운데 3분의 1은 삼성, 현대차 등 글로벌 기업으로 이동했다.
우정엽 전 외교전략기획관과 김동조 전 청와대 외신대변인이 현대차에 영입된 데 이어 ‘북미통’으로 꼽히는 고윤주 전 북미국장이 지난해 LG화학 최고지속가능전략책임자(CSSO·전무)로 이동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외교 공무원이 국내 굴지 기업의 대관을 맡는 건 최근 글로벌 여건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세 전쟁은 물론이고 유럽의 환경규제 등 다양한 통상 갈등과 규제 리스크가 커지자 기업 입장에선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외교관 출신 인력을 영입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직접 외교전에 나서고 있는 배경이다.
이들은 글로벌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과 학계·전문가 간 가교 역할도 수행한다.
전직 고위급 외교관은 "외교부에서 각국 이슈에 대응하는 시나리오를 짜던 경험과 능력을 기업 단위에서 발휘한다고 보면 된다"며 "기업에서 각국의 새로운 정책·규제에 대응할 때 외교부 출신들이 외교·통상 전문가를 모아 비공개 미팅을 마련하는 일도 많다"고 전했다.

상위 5대 그룹은 해외 대관업무를 전담하는 전문조직까지 신설·확충하고 나섰다.
기업들의 움직임은 특히 미국에 방점을 두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나 삼성전자는 러시아 사업을 접은 게 큰 학습비용이 됐다"며 "2014년 크림반도 침공을 보고도 우크라이나 전쟁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에서 센싱 능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을 했다"고 진단했다.
삼성전자는 2018년 7월 미국·유럽·중국 시장에서 글로벌 대관 업무를 총괄하는 GPA(Global Public Affairs) 조직을 신설한 이후 2023년 말 김원경 사장을 승진시키면서 조직을 ‘실’로 격상했다.
미국법인 대외협력실장으로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도 영입했는데,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교체설이 돌고 있다.
SK그룹은 지난해 미국법인을 없애고 ‘북미 대관’ 컨트롤타워로 SK아메리카스를 신설한 바 있다.
대관 컨트롤타워 신설은 최태원 회장의 특명으로 전해졌다.
미 무역대표부(USTR) 비서실장 등을 지낸 폴 딜레이니 부사장이 대관 총괄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초 GPO를 사업부로 격상한 후 등록 로비스트를 역대 최대 규모인 40명까지 늘렸으며 LG그룹은 워싱턴사무소에 전자·화학·에너지솔루션 소속으로 인력 10여명을 파견한 상태다.
트럼프 1기 시절 백악관 부비서실장을 지낸 조 헤이긴 소장이 지휘한다.
또 포스코는 김경찬 법인장이 이끄는 포스코아메리카에서 대관을 총괄한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우리 기업들의 대미 투자가 확대되면서 미 행정부의 정책 변화가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특히 최근 통상정책이 급변하는 흐름이 나타나면서 기업들이 해외 대관조직을 보강하는 등 대응에 나서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조성필 기자 gatozz@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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