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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 “상실과 그리움, 그 속절없는 맞닥뜨림을 정직하게 응시”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돌봄도 없이’ 펴낸 박준 시인
‘우리가 함께…’ 이후 7년 만에 새 작품
상실·슬픔 등 전작들과 테마는 같지만
다양한 변주 아닌 수묵화 그리는 기분
전작들은 연해진 감정 응시하면서 써
이번엔 감정을 곧이 맞이하며 담아내
다만 감정 너무 들끓을 땐 침묵을 선택
나를 통해 詩 매력에 빠진 사람 볼때면
아무도 부여하지 않았지만 책임감 느껴
정서적으로 의미 나눌 표현들 많아져야


어떤 시인은 두 권의 시집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영원히 기억된다.
상실과 슬픔의 지난 자리를 들여다보며 기록한 시편들로 시단에 일대 돌풍을 일으키며 수십만 독자의 공명을 촉발한 그 이름, 박준(42)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창비)로 돌아왔다.
2018년 시집 이후 7년 만의 신작이다.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펴낸 박준 시인이 14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텍스트와 미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시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랐다.
최상수 기자
“마중도 배웅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들 앞에서는 그냥 양손을 펴 보일 거야”(시 ‘손금’ 부분)라는 문장에서 따온 제목은, 첫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2012)과 두 번째 시집(‘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8)에 비하면 고엽처럼 바스러지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시집을 여는 서시(序詩)에 수록된 참회하는 화자의 건조한 단어들은 그 메마른 씁쓸함을 배가한다.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안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 나는 나무 밑에서 미안해하고/ 나는 호숫가에서 뉘우치며/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시 ‘지각’). 슬픔 앞에서 미안해하고, 미안함 앞에서 반성하고, 잘못 앞에서 슬퍼하는 늦된 화자는 깨달음에 다가갈 때도 지각생이 된다.
등단 17년차의 이 과작(寡作)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시집을 엮었을까.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펴낸 박준 시인이 14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텍스트와 미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시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랐다.
최상수 기자
?시집의 첫인상은 ‘바싹 말라 있는 듯한’ 느낌이다.


“조금 더 친절한, 혹은 조금 더 시인의 문장 같은 제목을 붙여볼까도 했다.
‘우리는 시간을 어디에 흘리고 온 것일까’(시 ‘미아’ 부분),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시 ‘소일’ 부분) 같은. 그런데 이번 시집이 전작들과 달라진 면이 있다.
제목으로 (변화를) 선언하고자 했다.
시집 전체를 가장 잘 아우를 수 있는, 그리고 변화한 모습을 설핏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이면 했다.


?시집을 묶고 보니 시인 스스로 변화한 시의 양상이 감지되던가.

“전작들과 테마는 같다.
(주제는) 상실일 수도, 슬픔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젊은 시인의 호기나 욕망이 컸다.
이전의 시들이 ‘이 씁쓸함을 어떻게 다채롭게 표현해 볼까, 슬픔과 아린 마음도 결국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 실험의 결과라면, 지금은 정자세로 응시하며 정직하게 바라보고자 한다.
과거에 신인의 패기로 여러 색깔을 쓰며 이런저런 변주를 시도했다면, 지금은 수묵화를 그리는 기분이다.


이번 시집을 쓰고 엮는 동안 시인은 “도처에 난무하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정신없이” 치러내야 했다.
인간으로서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슬픔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그래서일까.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조문객이 일순간 돌연한 자각을 얻는 수록작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소제목으로 취한 시집의 4부에 실린 시들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리워 있다.
그나마도 시인이 쓸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썼을 뿐이다.
차마 언어로 옮길 수 없어 쓰지 못한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더 많았다.

“제가 겪은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슬픔입니다.
불행한 일들을 누구나 겪고 사는데 ‘나만 괴롭다’고 쓸 수는 없죠. 한편으로는 이런 사건들을 문학으로 승화해 아름다운 걸 쓰려는 욕망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이런 일을 겪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고 도저히 못 쓰겠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슬픔과 상실을 다루는 데 꽤나 노련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에요. 삶을 시로 바꾸려 하는 저와, 시로는 온전히 쓰지 못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제가 충돌한 결과가 이번 시집에 담겼습니다.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펴낸 박준 시인이 14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텍스트와 미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시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랐다.
최상수 기자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이 흘러 강렬한 기억의 농도가 연해진 후 감정의 흔적을 응시하며 썼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감정을 곧이 맞이한다.
다만 함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선 침묵한다.
“이번 시집에선 말을 하다 말곤 해요. ‘이것까지 다 말하면 안 되지 않을까’ 싶은데 내 안의 정서는 너무 들끓을 때 침묵할 수밖에 없었어요.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은 이면이 더 중요할 때가 있잖아요. 다행히도 시는 침묵을 관대하게 받아주는 장르이고요.” 박준이 만들어낸 여백은 그러나, 덜 말하는 방식으로 더 선연히 존재한다.

삶과 시간에 물어뜯기고 지친 시인은 시라는 집 안에 들어가 쪼그려 앉은 채 장대비 맞은 짐승처럼 가르릉댄다.
그러고는 감정이 머무른 자리를 천천히 모아 오래 본다.
“속절없이 맞닥뜨리고 있는 것과 애를 쓰며 다시 마주하고자 하는 것의 사이가 이참에 아주 멀어지기를 영영 아득해져서는 삶의 어느 장면에서도 한데 놓이는 일이 없기를 일단 그때까지는 한쪽의 시간을 두텁게 쌓고 볼 것입니다”(시 ‘쪽’ 부분)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를 묶던 스물아홉의 시인은 시집의 첫 장, ‘시인의 말’ 첫 문장에서 “나도 당신처럼 아름다워 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고 썼다.
그러고는 ‘당신’ 혹은 ‘미인’(美人)을 향해 다정한 마음을 담아 한결같은 연서를 보냈다.
시인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사십대가 된 시인은 ‘마중도 배웅도 없이’의 마지막 장에 놓인 ‘시인의 말’을 이렇게 썼다.
“다음 길은 얼마나 멀까/ 벗들은 여전히 나를 견디어줄까/ 길섶 드리워진 그늘마다 다시 짙을까/ 눈도 한번 감지 못하고/ 담아두어야 하는 것들이/ 나를 너에게 데려다줄까”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신음이다.
시인의 순정한 수행과 묵묵한 고운 마음이 그를 ‘당신’에게 데려갈 수 있을까. 여기에는 “자조도, 분노도 있다”고 시인은 말했다.


내면에서 사납게 끓어오르는 것들을 앓으며, 오래 어렵게 써낸 이 시들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이번 시집이 경계이자 마침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 다음 시집은 굉장히 자유로워질 것 같아요. 차마 쓰지 못할 것들을 이제 다 썼잖아요. 화해한 기억들, 혹은 화해는 못했지만 옆으로나마 흘겨볼 수 있는 사건이나 생각들을 소재로 쓰는 건 조금 더 자유로운 일 아닐까요. 다음에는 꽃 보고 바다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빛 보며 좋은 것만 보고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밥을 하는 마음으로 이번 시집을 썼다면 다음에는 주말에 누군가를 초대해서 요리하는 마음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밥은 꼭 해야 되는 것이고, 주말 요리는 좋아서 하는 차이죠.”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펴낸 박준 시인이 14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텍스트와 미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시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랐다.
최상수 기자
시인의 초대 요리를 몇 년 후에야 시집의 꼴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첫 시집서 두 번째까지 6년, 그다음은 7년이 걸렸다.
오래 퇴고하는 시인의 성향 탓이기도 하지만, 초대형 베스트셀러인 두 권의 시집에 쏟아진 찬사로 ‘문단의 아이돌’로 불리게 된 그에게 전국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을 만난 날, 그는 전날에도 부산 한 공립도서관에서 강연하고 돌아온 차였다.


강연 일정이 얼마나 잦은지를 묻자, 그는 일정이 빼곡히 기록된 휴대전화 달력 화면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어떤 달에는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하루 한두 건의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주로 중·고등학교다.
전교생이 6명뿐인 학교에 가기도 한다.


“책상에서 좋은 시를 쓰는 것이 물론 시인의 가장 중요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걸 해낼 수 있다면, 2025년에 여전히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꼭 시인이 되지 않더라도 생각하는 바를 텍스트로 써내려가는 것과 텍스트에 담긴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널리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전국을 돌며 독자를 만나는 건 큰 사랑을 받은 시인이 느끼는 책임감 때문일까.

누구도 내게 그런 책임감을 지운 적은 없다.
‘난 시를 알려야 해’ 하는 마음은 아니다.
그런데 강연을 다니며 청소년들을 만나면 ‘수행평가도 아니고, 누구의 강요도 없었지만 어느 날 문득 시집이라는 걸 읽고 싶어 처음으로 샀는데 그게 당신의 책이었다.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내 시집을 읽어보고 또 시집을 샀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그렇다.
그때부터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답한다.
그럴 때 책임감을 느낀요. 입문이 입문에서 끝나지 않고 독자들이 시의 세계로 좀 더 걸어 들어가야 할텐데, 내가 똑바로 써야….(웃음) 독자들이 시에 대한 식견과 취향이 공고해져 다른 시인들을 좋아하게 되는 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숨가쁜 일정을 소화하다 책상머리에 앉아 서정시인 모드로 전환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시라는 게 블록 놀이 같다.
단상 혹은 문장, 낱말 단위들이 하나의 작은 블록처럼 존재한다.
블록을 최대한 쌓아두다 어떠한 정서나 순간, 사건에 어울리는 것들을 끄집어낸다.
그걸로 고래도 건물도 얼굴도 만들 수 있는 거다.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는 일은 바로 시가 되지 않고, 바쁜 일상을 사는 일은 시 한 편을 완성하는 데는 큰 지장을 준다.
그런데 나중에 완성될 시의 원재료를 만드는 일, 시를 촉발하는 일에는 큰 도움을 준다.
사실 먹고 사는 일에 수반되는 염증과 가끔 있는 즐거움 같은 일상적인 감정 없이는 시가 나오지 않는다.
피곤할 땐 어디서든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들듯, 시간을 조각조각 잘라 빈 벽만 있으면 (시를) 쓴다.


첫 시집을 64쇄까지 찍었을 만큼 경이로운 판매고를 기록한 시인이지만, 판매 수치로 환산되지 않을 평단의 상찬도 함께 받았다.
“한국어로 시를 쓰고 읽어 온 백 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새겨놓은 심미적 유전형질 같은 것이 그의 시에는 있다”(신형철 평론가)거나, 시인에게서 백석·윤동주·소월·만해의 시적 전통을 읽어내는 송종원 평론가처럼 말이다.


이제 100년을 조금 넘긴 한국 현대시사에 뒤이어온 서정시인으로서 그는 시의 영토가 협소해져 가는 광경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시의 자리가 비좁아진다는 건 단순히 시집이 잘 안 팔린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내 마음은 호수요’같이 누구나 알 거라 여겨지던 시어들이 더 이상 잘 통용되지 않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좋을 때도 슬플 때도 ‘찢었다’, ‘미쳤다’뿐이라면 의미 전달은 빠르겠지만 정서적으로는 가로막힙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국 시들을 골라 ‘이런 시를 저는 이렇게 감상해요. 이렇게 읽고는 좋았고 한편 슬펐어요’ 하고 말거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텍스트와 미감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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