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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빼앗긴 할머니들의 삶에 작은 보상 …‘고래등 같은 큰 집’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56)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평범한 주택가 자리잡은 전시관
기단부터 온통 전벽돌로 웅장하게
자갈 깔린 입구 ‘쇄석길’ 들어서면
공포스러운 ‘군홧발’ 소리 울려
일제강점기 할머니의 두려움 연상케
추모관 벽돌 틈새로 보이는 동네 풍경
삶이 전쟁이었던 그들의 희생 깨달아


저층 주택 몇 채가 모여 있는 평범한 주택가. 이곳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겪었던 아픈 역사를 다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있을 거란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박물관이 주택가에 들어서게 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33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가 처음 열렸다.
이후 이 집회는 ‘수요시위’가 되었고 지금도 열린다.

집회는 정의기억연대(옛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소속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주도로 시작됐다.
수요시위가 시작되고 10년이 지난 2003년 정의기억연대는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웠고, 이듬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위원회’를 조직했다.
당시 정부와 국회는 예산을 지원했고 서울시는 서대문독립공원 내 매점 터를 박물관 건립 부지로 기부했다.
일반적으로 어떤 시설을 지을 때 토지매입비가 가장 많은 예산을 차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울시의 기부는 큰 지원이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외관
그런데 몇몇 독립운동 단체가 “항일운동 성지에 ‘위안부 박물관’이 들어서는 건 부지 성격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그들은 서대문독립공원 내 위안부 박물관 건립은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다.
〈세계일보 2008년 11월 3일자 기사 참조〉 우여곡절 끝에 착공은 했지만 공사는 결국 중단됐고, 건립위원회에서 밝힌 정식 입장은 ‘보류’였다.
1000회 이상 수요시위를 연 할머니들은 그전부터 자신들의 잃어버린 인권과 명예가 회복되길 기다렸듯이 이번에도 기다리기로 했다.
다만 박물관 건립 자체를 미루지는 않았다.
건립위원회는 모금액 17억원 중 상당 부분을 박물관 건립 부지와 주택 매입에 썼다.
남은 예산은 많지 않았다.
건립위원회는 기존 집을 리모델링해서 박물관으로 쓰기로 했다.

재능기부로 첫 번째 박물관 설계를 맡았던 ATEC건축의 김희옥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설계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다.
4개 회사가 낸 설계안 중 장영철과 전숙희 건축가가 이끄는 와이즈(WISE)건축이 ‘기억과 추모와 치유와 기록’이라는 주제로 낸 설계안이 뽑혔다.
심사위원들은 전시 공간을 과감히 2층으로 올리고 1층에서 관람객들과 박물관 관계자가 소통하는 ‘사랑방 같은 박물관’이라는 개념을 높게 평가했다.
건축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주출입구가 있는 대지 서쪽 모서리에서 시작된다.
방문객이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건물을 오른쪽에 끼고 돌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방문객들은 박물관을 큰 건물이라고 느낀다.
이유는 건물 기단부에 쓰인 전벽돌이 건물 전체에 사용돼 건물과 기단부가 하나의 큰 덩어리로 인지되기 때문이다.
그럼, 건축가가 건물을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만든 이유는 뭘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래 등 같은 큰 집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건축가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고래 등 같은 큰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좋은 집이다.
순국선열들이 기념되는 집도 큰 집이다.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런 큰 집을 가지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이 전쟁터라는 비일상적인 환경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는 쇄석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쓰인 전벽돌(흙을 구워 납작하게 만든 벽돌)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벽돌 한 장 한 장이 쌓여 만들어진 박물관은 개별적인 힘들이 모여 이곳을 만들 수 있었다는 건립 과정을 강조한다.
둘째, 벽돌의 검은색은 설계자가 제안한 ‘기억과 추모와 치유와 기록’이라는 이야기를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집’을 짓는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재료가 벽돌이라는 점을 통해 벽돌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상’과 ‘평범함’을 대변한다.
박물관으로 바뀌기 전에 주택도 어느 한 가족의 일상을 담은 벽돌로 지어진 흔한 단독주택이었다.

이 중 마지막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건축재료 중 가장 작은 크기의 벽돌이 쌓여 집이 되듯 작은 순간순간이 쌓여 우리의 일상이 된다.
그렇게 쌓인 일상이 인생이 된다.
그래서 벽돌로 지어진 흔한 단독주택 몇 채가 몰려 있는 현재 위치는 일상을 보여주는 최적의 장소다.
문제는 지극한 일상 속 집이 담고 있는 ‘전쟁’이라는 콘텐츠다.
전쟁만큼 평범한 삶이 송두리째 뽑히고, 평범하지 않은 생각이 용인되는 시기도 없기 때문이다.

극과 극에 있는 일상의 동네와 전쟁터는 의외로 순식간에 바뀐다.
이를 느끼는 첫 번째 공간은 박물관의 작은 출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리는 좁은 통로다.
‘쇄석길’이라 불리는 이 통로에서 방문객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군홧발 소리를 듣는다.
쇄석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뒤섞이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상적 삶이 전쟁터라는 비일상적 환경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다.
동시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상상하게 된다.

일상과 전쟁이 실제로는 정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걸 느끼는 두 번째 공간은 박물관 2층에 마련된 추모관이다.
주택으로 쓰일 당시 발코니였던 이곳에는 벽돌을 듬성듬성 쌓아 만든 벽이 있다.
벽돌 안쪽에는 세상을 뜬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과 이름, 사망 날짜가 적혀 있다.
벽돌과 벽돌 사이 틈을 통해서는 박물관 주변의 동네 풍경이 포개진다.
내게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동네 풍경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이 새겨진 벽돌이 포개져 있는 추모관
현재 나의 일상이 순국선열들의 자랑스러운 독립투쟁을 통해서만 얻어졌다고 단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장소에서 추모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아픈 과거가 지금 나의 하루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이 둘이 모두 있었기에 이곳에서 보이는 평범한 풍경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

추모의 벽이 만들어 내는 장면을 보면서 특별한 것 없는 풍경을 지닌 주택가와 박물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 사이의 간극을 굳이 메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차이가 있기에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전쟁의 실상과 그 전쟁으로 희생된 할머니들을 더 처절하게 추모하고 기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잘 모르는 것을 알려 주려 하지 말고 내가 잘 아는 것을 통해 무엇이든 느끼게 해주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다.
내가 공감하고 싶은 곳의 분위기만이라도 아이가 느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나만의 교육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딸아이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
박물관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사실을 딸아이에게 설명해 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울컥하게 만든, 늘 보아온 주변의 평범한 풍경을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은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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