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불행이 사라지면 시기·질투
불온한 감정을 가진 적 없는지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코’(‘라쇼몬’에 수록, 서은혜 옮김, 민음사)
예전에는 소설에서 이야기나 플롯 같은 요소들이 중요하다고 여겼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게 되었다.
소설을 쓰고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인물의 감정을 더 집중해서 보게 되고 살피게 된다.
별로 새로운 것 없는 이야기에도 변화를 주고 독자에게 감정이입, 공감하게 만드는 힘은 인물이 어떠한 감정으로 그렇게 행동했는가? 하는 점이라고 느껴서이다.
감정(感情)의 사전적 뜻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이다.
사람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은데 그게 자신의 욕망이나 모순되는 지점에서는 더 복잡해지기 마련 아닐까. 그래서 줄거리가 아무리 단순해도 결코 그런 이야기만으로 끝나버리지 않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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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소설가 |
쉰 살이 넘은 젠치 큰스님은 남다른 코를 가졌는데 그건 마치 “가늘고 긴 순대 비슷한 물건이 턱 하니 얼굴 한가운데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밥 먹을 때도 불편하고 타인들의 시선도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불도에 정진해야 할 몸으로 고작 자신의 코나 걱정하고 있는 걸 들키기도 싫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코만 보는 것 같고 스님 역시 사람들을 볼 때 거의 그들의 정상적인 코만 보여 부러운 마음과 근심이 커진다.
아무리 봐도 자신과 같은 코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이 코를 짧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
그러던 중 도쿄에 다녀온 제자승이 아는 의사에게 그 방법을 배워 왔다고 했다.
뜨거운 물에 코를 삶아 그 코를 밟게 하면 된다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제자승은 뜨거운 물에 담갔다 꺼낸 스님의 코를 의사 말대로 꽉꽉 밟아댔다.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스님은 누운 자세로 제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남들 같은 코를 가질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두 번 반복하자 정말 코가 짧아졌다.
입술 밑까지 늘어졌던 코는 오그라든 채로 윗입술 위까지만 내려왔다.
그제야 스님의 골칫거리는 사라졌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어땠을까. 이제 이 뒷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건 그 달라진 코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자신의 코에 만족하게 된 스님을 보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의 기형적인, 남과 같지 않은 코를 가진 스님을 동정하고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이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불행을 겪던 이가 그걸 극복하고 났는데 어째서인가 돌연히 다시 그 불행 속으로 빠뜨려보고 싶다는 이기적이고 모순되는 감정 때문에 이제 코를 치료해준 제자승도 동자도 마을 사람들도 스님의 코를 대놓고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비웃기 시작했고 평정심을 잃은 스님은 심술궂게 변했다.
그토록 짧아지길 원했던 코가, 다시 늘어날까 봐 불안하기까지 했던 코가 되레 불만족스럽고 원망스러워지다니.
이 단편에서 ‘코’란 무엇일까. 짐작하며 그 상징성만 보았던 때와 달리 이제는 본문의 진술처럼 스님이 느낀 “방관자의 이기주의”에 대해 더 숙고하게 된다.
그 부정적이고 제어하기 어려운, 어쩌면 깊숙이 감춰진 인간 본성에 가까운 감정에 대하여. 그리하여 훌쩍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타인의 무엇인가를 보고, 불행이나 슬픔을 겪어낸 누군가를 보고 그러한 불온한 감정을 가진 것은 없는지, 무의식적으로 그런 시선을 보냈거나 심지어 행동한 적은 없는지에 대해서. 어떤 감정은 문제적이고 주관적이므로 그것이 맹목적으로 타인을 향할 땐 자기 돌아봄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느 바람 불던 밤, 스님이 별안간 가려워진 코에 손을 대보니 좀 부어 있었다.
풀 죽은 스님은 기도할 때처럼 공손한 손길로 코를 만지며 “억지로 짧게 만들어서 병이 난 건지도 몰라” 중얼거리곤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절 마당이 황금을 깔아 놓은 듯 찬란하게 보였고 그때 익숙했던 감각이 스님에게 찾아왔다.
코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스님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비로소 자기 자신을 되찾은 듯한.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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