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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의 쓸쓸한 죽음과 조력 자살 [서아람의 변호사 외전]

알츠하이머 앓던 배우 진 해크먼
아내의 죽음 인지 못하고 방치
조력자 사라지자 결국 고독사
‘존엄있는 죽음’ 대한 질문 던져


‘변호사외전’을 처음 시작할 때 “사회의 시의적절한 이슈들을 쉽게 풀어쓰는 법률적 설명과 함께 들여다보는 칼럼”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대통령의 구속취소와 석방 소식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지금, 구속기간 산입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다뤄야 하나 생각했지만, 제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새통이 된 사회면에서 저만치 밀려나 버린 어떤 노(老)영화배우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진 해크먼’은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영화배우였습니다.
1930년 출생한 그는 ‘프렌치 커넥션’ ‘슈퍼맨 시리즈’ ‘용서받지 못한 자’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로얄 테넌바움’ 등의 쟁쟁한 걸작들에 출연했고, 다섯 번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두 번 트로피를 거머쥐었습니다.
건강 악화로 2004년 은퇴한 그는, 올해 2월 말 자택 현관에 쓰러진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욕실 바닥에서 미라화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키우던 반려견은 기이하게도 벽장 속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워낙 의심스러운 정황에 살인, 강도, 가스 중독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부검 결과 해크먼은 알츠하이머로 인한 심혈관 질환으로, 그의 아내는 그로부터 일주일 전 다른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부검의들은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였던 해크먼이 아내의 죽음을 인지하지조차 못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인지능력이 극도로 떨어진 노인이 아내의 시신을 욕실에 둔 채 일주일 넘게 혼자 병을 앓다가, 개가 시끄럽게 짖어대자 벽장에 넣고 문을 닫아버렸고,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열흘 가까이 그 상태로 방치되었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사건의 전말입니다.
이 얼마나 외롭고, 안타깝고, 쓸쓸한 죽음인지요.

진 해크먼의 기사를 읽고 있으니, 최근 출간된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집이 떠오릅니다.
남 작가는 2023년 8월 스위스의 조력자살단체인 ‘디그니타스’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모친과 가족들의 여정을 책에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말기 암 환자였던 남 작가의 모친은 온몸을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조력 사망을 허용하는 스위스행을 택했고, 스위스에서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낸 후 약물을 마시고 조용히 잠들 듯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몇 천만 원의 비용과 몇 개월의 기간이 걸렸고, 엄청난 양의 서류가 동원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조력자살은 ‘자살방조’로 엄연히 형법상 처벌되는 행위이기에, 가족들은 언제 누구에 의해 신고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합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현재까지 열두 명 남짓한 한국인이 죽어가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디그니타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력자살이라는 단어 대신 ‘존엄사’라는 단어를 사용해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 혈액투석 등 인위적인 연명 치료를 받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료를 소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에서 나아가 생명을 단축하기 위한 적극적인 수단을 취하는 것은 무조건 불법입니다.
21대 국회에서 조력존엄사법이 한 국회의원에 의하여 발의되었지만 임기 만료로 소리 소문도 없이 폐기되었습니다.
불치병인 척수염 진단을 받은 어느 환자는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헌법상 기본권 침해에 해당한다며 2023년 12월 헌법소원을 냈지만 아직까지 헌법재판소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고, 행정부와 법무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위헌이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조력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함부로 도입했다가 의료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혼란과 생명 경시 풍조를 불러올 것이 염려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누가 판단하나요? 여기에 대해 국민의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나요? 각종 비공식적 설문 조사나 통계에서는 국민의 70~80% 이상이 존엄사에 찬성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취지의 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은 무려 이백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에게 수십 개의 호스와 주사기를 꽂아 강제로 숨을 붙여놓는 것이 정말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행동일지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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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람 변호사
작년 말 영국에서는 ‘불치병 성인 임종 중환자 법’이라는 제목으로 조력사법이 하원을 통과했습니다.
2015년에는 330대 118로 부결되었던 법안이, 무려 9년 만에 가결된 것입니다.
본회의 투표 전 실시한 시민 여론조사에서는 무려 73%가 조력사를 찬성했고, 총리, 노동부 장관, 안보부 장관 등이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어느 국회의원은 하원 통과 이후, 암 말기로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가족의 경험이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도 그런 경험을 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조력사법에 반대하는 측은 물론이고 찬성하는 측에서도 조력사가 쉽고 경솔하게 행해져서는 절대 안 되며 어느 경우에도 조력사보다는 고통을 경감하는 ‘완화치료’가 선행되어야 하며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력사법을 찬성한다고 해서 생명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거나 완화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른 것도 아닌 우리 자신의, 우리 가족들의 삶에 관한 것이니까요. 치료를 통해 고통을 덜고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늘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법에서 하지 말라고 강제하더라도 사람들은 약물과 주사기와 메스를 동원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뭔가를 더 하는 것이 오직 고통과 아픔만을 초래할 때, 여기가 끝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진지한 논의라도 시작해 보자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가족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형벌의 위험성에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족에게, 삶이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하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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