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상당히 좋아했지만 '드라마'도 만만치않게 좋아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중심은 '영화'였고 그 다음은 '드라마', 그 중에서도 '미드'였죠. 한국드라마는 후순위였고, 보더라 하더라도 심심풀이 땅콩 내지는 좋은 작품을 선별에 선별을 거쳐 보는 정도였습니다. 이유는 과거 한국드라마는 유행에 따른 양산형 컨텐츠에 가가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안정적 재미와 현재 트렌드에는 분명 민감할 수는 있지만 작품으로 보기에는 창의적이지 못했고 질적으로 떨어지는 부분이 많았죠. 물론 이 작은 나라에서 의외로 엄청나게 찍어내는 드라마 편수와 대규모의 자본덕분에 일년에 한두편 정도는 정말 괜찮은 작품들도 심심찮게 나왔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 한두편의 드라마가 취향에 맞지 않는경우에 발생하지만요. 자연스레 시선이 해외드라마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죠. 해외도 수많은 드라마 중 좋은 작품의 비율은 한국과 별반 차이는 없지만 저변자체가 다릅니다. 특히 '미드'의 경우는 정말 엄청나게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작품늬 질이 문제가 엄청난 수량에서 밀려오 개인의 '선택장애'를 걱정하는 처지가 될 지경이니까요.

-2022 드라마 결산 : https://blog.naver.com/rdgcwg/222990348741

그러던 와중 최근 몇 년간 한국 드라마의 퀄리티는 정말 엄청나게 높아졌다고 생각됩니다. 한 해를 기점으로 봐도 재미있고 다양하면서 일정부분 작품적 완성도까지 갖춘 작품들이 정말 심심찮게 나옵니다. (이상하게 한국영화쪽은 반비례해서 영화적 퀄리티는 점점 하락해 이제는 기대도 안할 수준이지만요.) 여전히 '미드'쪽의 넘사벽 드라마들이 넘쳐나긴 하지만 아무래도 언어와 문화쪽에 익숙한 한드에 빠지면 좀 더 몰입감있게 볼 수 있어 좋네요. 개인적으로는 영화보는 편수가 절반가까이 줄고 드라마보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네요. 드라마 환경이 좋아지고 OTT로 인하여 자본이 유입되고 창의적인 연출의 발판이 마련되니 당연히 좋아질 수 밖에 없겠죠. 거기에 함께 높아지는 관객의 수준과 실시간으로 피드백이 될 수 있는 SNS 등의 발달 등도 빠질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글로리'를 주행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직 정주행완료를 하지 못해서 스포라고 할만한 건 없을 겁니다.) 한 여자의 차가운 복수극을 주제로 한 이 드라마는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복수, 잔혹함, 치밀한 계획, 배신 등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닳고 닳게 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리'는 홀로 빛났습니다. 복수를 위한 한 여자의 나래이션은 내내 차가웠고, 보는 이에게 공감이나 응원보다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지켜보게 만드는 힘을 가졌더군요. 한 여자의 피해과정보다 그 여자의 현재의 삶에 더욱 마음이 가고, 복수의 과정이나 결말보다 복수를 준비하는 그 여자의 심정이 더욱 끌리는 복수극은 처음인 듯 하네요.

이 드라마를 보며 새삼 '김은숙'작가가 '킹덤'같은 작품도 쓰고 '미스터 선샤인'같은 작품을 동시에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더군요. 전자가 시각효과에 주목하며 블록버스터적 재미와 중상모략의 이야기에 매력을 더한 작품이라면 '미스터 선샤인'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감성적'이면서 '공감'까지 사로잡는 대사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 드라마였죠. 전 '글로리'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네요. 그래서 이 드라마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복수의 과정이나 앞으로 나올 결과가 아니라 주인공의 나래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나지막히 부르는 가해자의 이름과 독백속에는 그녀의 바램,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과정과 감정선들이 때론 직접적으로 때론 상징적으로 관객에게 그려지게 하는 힘이 있더군요. 서늘하면서 잔혹하지만 눈살을 찌푸려지지 않고, 그려지지만 확 흐릿한 그런 감성들이 참 좋더군요. 악역들이 평면적이면서 상투적인 것은 조금 아쉽지만 아직 완결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몇 몇 캐릭터는 성장의 깊이를 예측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넷플릭스 추천 : https://blog.naver.com/rdgcwg/222978483330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가지 걱정아닌 걱정이 생기더군요. 최근 몇 몇 한국드라마를 보면 정말 잘 만든 드라마인데 결말의 벽을 넘지 못해 무너진 드라마들이 제법 있습니다. (물론 전 기나긴 과정이 재미있었다면 결말의 아쉬움은 조금 이해하고 넘어가는 편이긴 하지만) '글로리'가 보면 볼수록 매력적으로 다가오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송혜교가 가해자의 어린 자식들이나 아니면 자신의 앞으로의 행복(로맨스같은)같은 것 때문에 화해나 구원의 메신저가 되는 멍청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 말이죠. 이 드라마를 보며 제가 바라는 것은 차갑게 식은 그녀의 감정과 자신의 인생으로 갈아만든 치밀한 계획에서 나오는 복수의 완성이기 때문이죠. 비단 '학폭'의 잔혹성이나 사회적 문제성의 크기때문이 아니라 드라마의 완성도와 갈 방향은 분명 정해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 이해, 화해 등 우리 사회에서 필요하고 좋은 문구지만 작품내에서는 좀 더 신중해야 될 문제들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잘못된 화해와 구원으로 인하여 한 인간의 비뚤어진 복수극이 좋았던 것은 그동안 우리가 알던 피해자가 가해자가 내리는 상투적 선고를 전복의 미학으로서 새로움을 줬기 때문이죠. '글로리'는 상황이 다릅니다. 학창시절 피해를 받았던 이 한 여인의 표정에서 느끼고 말을 듣고 행동거지를 보고 있자면 애시당초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의 선택지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굳이 정주행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의 한국드라마의 행보가 걸어왔던 아쉬움을 현재라는 시간에 가둬두고 두려움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좋습니다. 문동은 박연진의 딸을 바라보며 미소지을 때마다 섬짓하고, 무표정에서 차갑게 나래이션 하는 그녀의 어투에 불안감이 스며들고, 그녀가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길 때마다 조마조마합니다. 이 모든 감정을 하나의 드라마에서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까진 너무 좋습니다. '글로리'가 아직까지 좋은 드라마이고 제가 결말을 걱정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넷플릭스 케이퍼 무비 : https://blog.naver.com/rdgcwg/22276871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