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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옹진 해주 (장문)
이름:  간담브이


등록일: 2022-07-05 09:34
조회수: 166 / 추천수: 0






첫 충돌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미소 양군이 맡기엔 38선은 너무 넓었고, 그 틈 사이로 (혹은 묵인 하에)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죠. 초반에는 서북청년단 등 남쪽이 더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만, 48년 당시에는 방어로 돌아섭니다. 남한 곳곳에서 단정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요. 반면 북한은 그 틈을 타 참 기세 등등하게 나왔죠. 그러다가 여순 사건이 벌어지자 그 움직임이 뚝 그칩니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듯 하죠.


국군이 공격적으로 변한 것은 주한미군이 철수한 1월 중순부터였습니다. 그 때도 지금도 평가는 둘로 나뉩니다. 외적으로는 미군을 그대로 붙잡아 두고, 내적으로는 반공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과 정말 북침하려는 것이었다는 거죠.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밀린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국군이 공격적이 돼 주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 쉬워졌을 뿐이었죠.


그 시작은 2월에 있었던 기사문리 포격입니다. 남한에서는 기사문리의 북한군이 침공하자 105mm 곡사포로 포격했다고 한 것이었죠. 반면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2월 3일에 군경이 침입해서 격퇴, 이후 35대의 트럭으로 침범하고 해군은 이북 15km까지 올라와 포격했음 4일에는 경찰이 38선 이북 500m지점 고지를 점령했다고 보고합니다. 육해군과 경찰까지 함께 한 합동작전이었다는 것이죠.


이 사건으로 미군은 국군이 보유한 105mm 포를 회수합니다 - -a 반면 소련군은 이걸 이용해 북한에 방어용 무기를 주기로 했죠.


이에 맞서 북한은 직접 공격보다는 침투한 간첩을 이용합니다. 배천에서는 북한의 간첩이었던 현역 경찰관 형제가 경찰서를 습격했고, 남한은 이에 대해 배천읍의 주민들을 북으로 보내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이런 간첩 투입은 남한에서도 있었으니, "해주 의거"입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최초의 정보공작 기관 대한관찰부였습니다. 해주의 시민들을 선동하고 각 주요 기관을 방화, 주요 인물을 암살하는 등의 임무를 띈 요원들이 침투했지만 결과는 실패였죠. -_-a 남한에서는 이것을 해주 시민들이 스스로 한 의거로 주장했고 북한에서는 이 공작원 14명을 붙잡아 처벌합니다. 여순 사건 같은 결과를 바란 거였지만 북한에서 여기에 호응할 만한 사람이 없는 상태였죠. (...) 해방 후 남한으로 내려 온 북한의 우익이 54만명, 나머지 우익계는 이미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한국은 이런 식의 공작을 몇 차례 더 한 것 같지만 별 실효가 없었고, 오히려 북한에 더 명분을 주게 됩니다. 미국도 방조하긴 했지만 짜증냈구요.


이런 가운데서 요충지에서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개성의 송악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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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고지는 미군도 당최 이남인지 이북인지 몰랐던 곳, 여기에 감제고지라는 이점 (개성이 바로 내려다보였습니다) 때문에 양군의 충돌이 당연시되는 곳이었습니다.


육탄 10용사를 만든 이 전투는 고문단장 로버트와 김석원과 함께 있던 조지프 클라우치의 주장이 다릅니다. 김석원의 경우야 당연히 북한군이 292 진지 공사 중 먼저 공격해서라고 했구요. 클라우치의 보고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 5월 3일 북한군 292고지, 106고지 점령 후 개성 향해 침투 개시 -> 1여단장(김석원) 11연대장에게 3개 중대의 제한적 공격 허가

"어떤 상황에서도 38선을 월경하지 말라"고 경고

- 5월 4일 03:00 292고지에서 북한군 공격 개시 -> 6중대, 하사관중대 06:00 292고지 공격 명령 -> 육탄 10용사 돌격 -> 점령 후 토치카 파괴 -> 북한군 "반자이" 돌격, 격퇴 -> 북한군 원래 지점으로 철수 -> 11연대 1, 2, 4중대 개성으로 증원

- 5월 5일 북한군 1개 중대 292고지로 병력 재이동 -> 구축 성공 -> 5월 6일 막대한 병력이 재집결하고 1개 중대가 월경했으나 구축됨


흥미로운 점은 현장에 있던 클라우치는 국군과 의견을 같이 하고 김석원이 38선 이북으로의 월경만큼은 절대 못 하게 했다는 걸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로버트 등은 남한의 도발을 원인으로 지목했다는 것이죠. 그는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 국군의 한 부대가 38선 이북 4km 가량 침입해 마을에 총을 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정병준 교수도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 못 합니다. 워낙에 다르긴 하니까요. 일단 얘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이 직후인 5월 5일에는 춘천 6여단의 강태무, 표무원 소령의 2개 대대가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려 245명이나 적에게 투항한 상태라서 충격도 참 컸죠. 북한에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이게 신호라도 되는 듯 해군에서 연달아 월북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6여단장 김백일은 이를 쫓아 38선을 넘으려 했지만 고문관에게 막혔고, 8일에는 1연대의 김종오, 김창룡이 이북 3km까지 침투해 북한군 1개 중대 이상을 섬멸시킵니다. 이는 독단적인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에도 북에서 내려오고 남에서 올라오는 일이 계속 벌어졌고, 최대 10km까지 양쪽이 왔다갔다를 반복했죠. 이런 가운데서 불길은 옹진으로 옮겨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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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은 북쪽의 해주와 38선으로 갈리면서 섬과 다름없이 돼 버렸습니다. 반면 해주는 항구가 막혀버렸지만요 - -a 국군으로서는 유사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던 반면, 북한 역시 옆구리를 찌르는 형국이라 병력을 쪼개더라도 먹어야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역시 화약고가 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죠.


이 곳의 중요한 고지로는 두 개의 국사봉과 은파산, 두락산, 까치산 등이 있는데 38선을 경계로 1km 이내에 있었습니다. 특히 두락산과 연결된 작은 국사봉은 38선을 관통해 정상은 이북에 있는 또 고약한 지역이었죠 -_-;


21일부터 북한군은 국사봉과 두락산을 공격했고, 이는 옹진의 고지 전체로 26일까지 이어집니다. 이 때는 주로 야습 후 국군이 반격하면 철수하는 식이었죠.


미군은 이를 500명 정도의 병력으로 추산했지만, 한국은 북한의 병력을 1000에서 1500으로 과장하면서 옹진 반도에 대대적인 증원을 실시합니다. 순식간에 옹진에 3000이나 되는 병력이 집결했죠. 미군은 참 황당해 했고, 국군은 이 무렵 전쟁위기설을 잔뜩 떠들어대면서 북침설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렇게 병력을 투입하면서도 정작 북한이 점령한 지역을 탈환하지 못 하고 있었다는 거죠. -_-;


6월 5일에는 옹진전투사령부가 설치됐고 김백일이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이 때 그는 두 대대의 월북으로 인해 짤린 상태였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영 시원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냥 닥돌만 한 것이었죠. 여러 차례의 실패에 걸쳐 6월 24일에는 이북의 은파산을 점령했고, 27일에는 이남에 있던 까치산을 탈환합니다. 이렇게 국군이 병력을 밀어붙인 후에야 옹진 반도는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이 때까지도 이남에 있던 두락산은 탈환하지 못 한 상태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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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이 되면서 38선은 조금씩 고요해집니다. 하지만 7월이 되면서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하죠. 이 때는 한국의 내부 역시 강경화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보도연맹이 조직됐고, 반민특위가 습격당했으며, 김구가 암살됩니다. 이런 가운데서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미국에서도 걱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승만의 지지기반이 흔들리던 가운데서 38선 충돌이 격화된 것은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승만부터 신성모, 채병덕 등을 비롯해 군의 수뇌부들도 전쟁이 코 앞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죠. 특히 신성모는 지금도 욕 먹는 3일 북벌론을 주장했습니다. 이 때의 분위기는 북한은 이미 먹은 거나 다름 없고 중국과 소련을 막기 위해 미국과 힘을 합쳐야 된다는 식의 말까지 나온 상황이었죠 -_-;


미국은 물론 당시 한국에 들어왔던 유엔한위도 이 모습을 똑똑히 지켜봅니다. 이 때 남북의 충돌은 UN에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했죠.


한편 6월 말에는 남한에서 150명에 이르는 병력을 북파합니다. 호림 부대입니다. 이들의 침투에 따라 북한은 나름 비상이 났고, 북한은 7월 말에 토벌이 완료됐다고 주장했지만 실은 9월에 가서야 끝났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북에 충격을 주긴 해서 주민들을 밤낮으로 500m 거리로 경비를 서게 할 정도였다고 하죠. 이렇게 한국의 두 번째 북파 시도는 끝났고, 북한은 또 이용해 먹습니다. -_-;


그런 가운데서 7월 초에는 10연대장 송요찬이 양양으로 침투해 고지를 점령한 후 반격을 당해 돌아왔고, 해임됩니다. 7월 말에는 개성의 1사단이 200m 앞이고 이북에 있던 488고지를 공격했고, 8월 초까지 고지의 주인이 두 번 바뀝니다. 진 쪽은 국군 -.-;


10연대의 공격이 있었던 직후, 국방장관 신성모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국군은 대통령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으며 어느 때라도 명령만 있으면 이북의 평양, 원산까지라도 1일 내에 완전 점령할 자신과 실력이 있다."


한편, 1사단의 공격이 있었을 때는 마침 장개석이 진해로 와서 회담을 하고 있었죠.


이 때문에 49년 6~7월에 있었던 38선 분쟁은 정치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내부 환기용이냐 정말 북침이냐는 것이었죠.


정부부터 국군 수뇌부까지 마치 정말 전쟁이 난 것 같은 발언을 했고, 미군은 49년 초부터 이를 계속 경계하며 막고 있었으며, 소련의 스티코프도 본국에 북한으로의 무기 지원을 요구하면서 북침설을 제기합니다. 여기에 당시 내무장관 김효석의 발언도 문제였죠. 원래 49년 7월의 "북벌"이 빨치산 때문에 연기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북침 계획이 너무 뻔해 새로운 공격 계획을 세우라는 미국의 지시에 따라 무산됐다고 스토리를 바꿉니다. 그리고 남한은 이런 스토리에 영감(...)을 계속 주었습니다.


"국군이 북한에 공격을 개시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현재의 뒤엉킨 국제 정세의 압력하에서는 정부는 마지못해 작전을 연기한다."


49년 9월 22일, 비밀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_-; 이 스토리의 엔딩은 호전적이었던 김석원과 채병덕을 10월에 "명태 사건"으로 잘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한의 북침설은 상당한 근거가 있고, 개전 당시 "해주 점령설"로 화려하게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맞다는 건 아니죠.


가장 결정적인 건, 남한은 북침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면 북침에 대한 계획이 아직까지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고, 그저 북침할 것 같다는 우려 뿐입니다. 그렇게 북침을 우려했던 소련 측의 문서도 9월부로 뚝 끊겨 버리죠. 미군은 북침에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무기 지원을 최대한 끊습니다. 미군 철수와 한국 내의 혼란을 생각하면 내부 환기용, 그리고 무력통일이라는 명분을 쥐기 위해서라고 봐야겠죠.


... 무능해서 고맙다고 해야 되나요 (...)


문제는 미국까지 걱정할 정도로 너무 떠들어댔습니다. 국군에 무기와 병력, 훈련이 충분하고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면 이승만은 분명히 북침 했을 겁니다. -_-; 하지만 그런 게 안 됐고 미국도 반대하는 상황에서 너무 떠들어댔고, 미국이 더 반대하는 결과만 낳았죠.


+) 미국도 북침이라면 몰라도 북한의 남침에 대해서는 반격을 해야 되며, 그 때 미국도 지원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전면 남침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49년 초부터 9월까지는 국군의 병력이 더 많았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판명난 상황은 아니고, 통일이 되더라도 그 전모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만, 현재까지 나온 자료(특히 소련 문서)들을 본다면 이 때까지 국군이 최고 1만 이상 더 많았던 모양입니다. 48년 말 5만이 채 안 되던 국군은 49년 9월에는 육해군 합쳐 10만의 병력으로 두 배나 늘어납니다. 반면 북한은 이 수를 따라잡지 못 하다가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중국과 소련에서 병력을 지원받으면서 역전하죠. 여순 사건 및 숙군 등으로 위기에 몰려 있던 한국 정부가 참 열심히 병력을 끌어모은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수적인 이점이 정부와 국군에게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는 정병준 교수의 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1만 이상의 차라 해도 북한군의 규모 역시 국군처럼 가파르게 커지고 있었고, 좀 많다 수준일 뿐 압도적인 수는 못 되니까요. 거기다 소련은 한국의 공격을 이용해 무기를 계속 북한에 주고 있던 반면 미군은 있던 무기도 뺏어 가고 있었구요 - -; 훈련도 면에서도 수만 무조건 늘린 국군보다 소련식 교범을 계속 받아들이면서 나중에는 아예 중국군과 소련군에서 병력을 지원받은 북한 쪽이 나아 보이거든요.


당시 국군의 작전을 봐도 김석원, 김백일 등이 우대받았지만 방식은 일본군 그대로였죠. 미군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고, 김석원 등은 자기가 원래 쓰던 방법을 (개돌 -.-) 선호해 미군과 충돌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번 글에서 얘기한 김석원과 백선엽의 에피소드를 다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개성에서는 육탄 10용사의 희생으로 겨우 고지를 뺏을 수 있었고, 옹진에서는 김백일이 무슨 러일전쟁의 203고지도 아니고 병력을 그대로 밀어붙이기만 했다가 계속 패했고, 이례적으로 대군을 파견한 다음에야 겨우 이길 수 있었습니다. 수에서 북한에 앞서고 있다 한들, 지금도 밝히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걸로 자신감을 얻기는 어려웠고, 실력 면에서도 자신할 수 없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장군 사이의 에피소드는 나름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그 에피소드 자체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죠. 북한이 내려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이 한창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앞으로 어찌할까라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확실한 점은 이 6월 이후로 북한군이 달라졌다는 게 눈에 뜨인다는 것이죠. 이게 실화라면 이런 환경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사에서 주장하듯 이것으로 국군의 방침이 아예 바뀐 것은 아닌 것 같구요. 어차피 이승만이 계속 북진 주장하는 상황에서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상황이구요.


하지만 7월 초의 양양 공격에서 송요찬이 해임됐고 (이전 북침 사례에서 해임된 적은 없습니다) 7월 말의 488고지는 겨우 200m 앞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국군의 무분별한 북침은 사라진 듯 합니다. 그래봐야 늘 싸우던 데에서는 계속 싸웠습니다만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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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에서 보듯 49년 초중반의 공격은 남북한이 딱히 누가 공격적이고 우세하다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 북한은 당연하고 미군까지 한국을 말리는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이 조성됐거든요.


우선 북한은 남한 내의 평화통일파들을 이용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부터 잘 이용해 먹었죠. 그 상황 하에서 북한은 평화 통일을 남한에 여러 차례 제의합니다. (소련조차 놀랄 정도였다고 하죠) 물론 여기에는 이승만 등 한국 정부는 배제돼 있었죠. 하지만 이 효과는 컸습니다. 여기에 여순 사건 등 한국 내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까지, 북한은 방어적이고 평화적으로 보였습니다. 남한에 비해서였긴 했지만 이건 컸죠. 반면 한국은 이런 내부의 문제와 38선에서 주도권을 잡는 문제가 겹치면서 북진 드립에 사활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러니 한국이 더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죠.


미국은 이런 한국을 계속 말려야 했구요. 만약 중국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미국의 생각이 또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긴 합니다만 미국은 중국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확실히 했고, 한국은 이에 놀라 북진 발언을 계속해야 했으며 미국은 더 싫어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애초에 미국이 생각한 국군의 규모는 6만 5천, 하지만 국군은 10만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국군의 1/3이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고, 미국은 이승만을 더 말리기 위해 기존에 주기로 했던 것도 제대로 안 주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죠. 뭐 분명 이승만을 말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여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이런 미국의 방침은 두 가지 이유로 나뉩니다. 첫째는 한국을 친미정부로 해 두기만 하고 더 이상의 전쟁은 싫다는 것, 그리고 소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는 거였죠.


2차 대전 후 미국은 냉전을 대비하긴 했지만 더 뻗어나가진 않고 자기가 이끄는 자유 진영의 재건을 꾀했습니다. 미군은 축소됐고, 이는 한국에서 역시 마찬가지였죠. 한국의 재건을 위한 법안이 통과됐고, 어차피 한반도 전체를 친미로 하기는 어려우니 한국만이라도 확실히 살려놓으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북진은 소련과의 충돌이 되고 국군을 믿을 수 없으니 미군이 직접 나서야 됐죠. 미국이 이걸 좋아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게 겨우 몇 년 전인데 또 다시 전쟁이라니요. -_-a


여기에 미국은 소련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실제 소련은 얄타 회담 등에서 정한 자기 영역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몰랐던 게 있었으니 중공이었죠. 스탈린은 자기가 직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대신 중공을 통해 북한을 밀어줍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단지 소련의 괴뢰가 아니었죠. 그거 외에도 북한 역시 대규모 남침하기에는 병력과 훈련도가 부족했습니다. 북한 역시 신생국에 불과했으니까요. 소련식 교범에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더 걸렸고, 중공과 소련에서 온 병력 역시 융화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 예상은 맞았고 이는 개전 초반 북한군의 여러 삽질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미국이 예상하지 못 한 건 김일성의 전쟁에 대한 욕망이었죠.


+) 이런 스탈린에 대한 믿음은 처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에서 소련이 직접 개입하진 않고 그리스 내 공산 세력을 지원했는데, 처칠은 죽는 순간까지도 여기에 스탈린과는 관련이 없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_-a



이런 생각이 맞물리면서 나온 것이 애치슨 라인입니다. 미국은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이승만 정권만 잘 제어하고 북침하지 않게 막고, 대신 각종 원조를 통해 한국을 재건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북한도 안 내려올 것이고 최소한 미국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거였죠. 이는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에게도 달콤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스탈린의 생각을 읽지 못 했고, 김일성이 그저 소련의 말만 듣는 괴뢰로만 여겼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김일성은 이승만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애치슨 선언이 있은 지 불과 5개월 후, 이를 선언한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참 여러 계층에서 지금까지 미친 듯이 까이게 됩니다. -_-;


7월 이후 잦아들기 시작했던 38선의 분쟁은 9월 이후 다시 불 붙습니다. 이미 7월부터 북한군이 강해졌다는 걸 느꼈지만, 이 때의 공격은 꽤 컸죠. 위력 정찰이나 고지전을 넘어서 한 지역을 점령하려는 국지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장소는 옹진 반도였습니다.



49년 초부터 구상한 소-중-북의 계획이 슬슬 나타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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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가 안 돼요 ㅠ_ㅠ) 어쩌죠.


마무리로 마땅히 넣을 데가 없어서 뒤로 뺀 얘기를 하겠습니다.


김석원이 고지전을 넘어서 심심하면 북한으로 넘어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부의 북진 드립과 함께 그의 호전적인 성격으로 미국이 그렇게 판단한 것은 맞아 보이구요.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 육탄 10용사입니다만... 역시 좋게만 볼 순 없습니다. 292고지의 경우 개성을 생각하면 국군이 차지해야 될 지역은 맞았으니까요. 이들 중 두 명이 생존했고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이용됐다고 하는데, 이게 맞더라도 신화에 좀 흠집이 갈 뿐 그 자체를 부정할 순 없습니다. 어쨌든 이들 덕분에 토치카가 파괴됐고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전면전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육탄 돌격을 해야 했나 싶긴 하군요. 다만 이걸 가미카제랑 비교할 순 없다고 봅니다. 어느 나라든 이런 돌격을 해 왔고 그걸 미화해 왔으니까요. 태평양 전쟁에서 여러 차례 보셨듯 미군도 중요한 고지나 토치카에 이런 공격을 감행했구요.



이 육탄 10용사와 이후에 나온 많은 국군의 육탄 돌격은 분명 그 희생정신을 존경해야 되는 일들입니다. 그 분들 덕분에 조금이라도 북한의 남진이 늦어졌고, 우리 국토가 한 치라도 늘 수 있었으니까요. 유사시 정말 퇴각할 수도 없고 목숨을 걸어야 되는 상황이 닥친다면, 제가 자원하지는 못 하더라도 여기 자원하는 이들을 개죽음이라고 몰아세울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무작정 미화하고 본받자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건 마치 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4승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설령 그 때는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더라도 중요한 건 그렇게 병사 하나하나를 죽을 길로 몰지 않아도 될 정도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겠죠. 이런 것들이 가난하고 힘 없을 때의 어쩔 수 없었던 일로만 남길 바랄 뿐입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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