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도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일본 총리, 스가 요시히데가 9월 29일에 실시되는 자민당 총재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총리와 자민당 당수에서 모두 내려오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정치계는 새로운 총리와 집권 여당 당수의 선출을 앞두게 되었는데요.
일본 총리가 사임을 밝히자 우리나라 언론들은 일본의 향후 일본 정치의 향방이나 대외 정책에 대한 전망을 하는 뉴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총리가 일본 첫 여성 총리가 나온다는 둥, 유력 후보로 누가 있다는 둥의 뉴스를 발행하고 있죠. 그리고 만약 그런 총리들이 취임하게 된다면 한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둥, 이런 저런 성향으로 인해 극동 아시아 정세가 어떻게 바뀔 거라는 둥의 뉴스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단언컨데, 이런 뉴스들은 하등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일본 총리 사임’과 ‘새로운 총리로 누가 될 것이냐’라는 어그로를 끌어서 자신들의 언론사에 조회수를 늘리려는 꼼수밖에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 뉴스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 총리가 바뀌는 것은 실상 일본의 대외 정책과 정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일본의 총리는 국회의 과반수 의결에 따라 선출이 진행됩니다. 다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관습적으로 집권정당(자민당)의 대표인 총재가 겸직을 하게 되는데, 어차피 투표를 해 봤자 일본이라는 국가의 건국 이래 사실상 단 한번도 정권을 놓지 않았던 집권여당인 자민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사실상의 요식행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일반 의원이 지명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럴 리는 없고, 최대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의 당수가 오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당의 당수가 총리가 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과 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를 하는 만큼 총리가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 총리를 ‘바지’로 만드는 악습, 세습정치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정치의 뿌리깊은 악습이자 병폐인 세습정치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현재 집권 여당인 자민당 의원 중 지역구를 세습 받은 이들은 1/3수준으로, 당연히 이렇기 때문에 내각에 등용되는 인물들 중 절반 이상이 세습 의원들이 많습니다. 유명 정치가들을 놓고 보면, 아베 신조는 3대째 세습인 정치인이며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도 자신의 지역구를 자신의 둘째 아들인 ‘펀쿨섹좌’고이즈미 신지로에게 물려줬죠. 아소 다로, 차기 총리감으로 손꼽히는 고노 다로 등등 유명 정치인들은 대부분 ‘명문가 출신’임을 자임하는 정치귀족 출신입니다. 선대의 기록을 따라가 보면 메이지유신 때부터 지금까지 정치를 하며 그 지역과 세력을 세습받아 온 가문들이기 때문에 뿌리도 매우 깊고 지역과의 유대도 상당히 탄탄하죠.
범위를 총리로 좁히면 그 실태는 만연하게 드러나는데, 집권당인 자민당 배출 총리 중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총리 중 세습 의원이 아닌 인물은 1956년의 이시바시 단잔 뿐입니다(그나마도 임기가 단 두달). 본인이 직접 선대를 통해 세습을 받지 않았더라도 본인이 자식에게 물려주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세습 정치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계파 정치는 청산되어야 한다’라는 발언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고이즈마 준이치로 전 총리조차도 실상은 자기 지역구를 아들에게 물려줬습니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자신의 아들을 지역구 세습을 위해 철저히 준비를 시키고 있었죠.
그렇다면 나머지 의원들은 세습을 받지 않은 선출직 의원들이냐면 그 또한 그렇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지역구와 세력을 세습하는 경우는 매우 여러 케이스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기 자식에게 세습을 하는 것일 뿐이지 자식이 없는 경우(혹은 자식이 정치를 부득불 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신의 비서 출신이나 정치적 후계자에게 이를 물려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렇다 보니 새로운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일본의 이런 세습 정치는 일본 정치의 전체적인 병폐를 뿌리 깊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 자민당에서는 세습을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안이 논의된 적이 있었지만 사실상 헛일이 되었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이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기 때문입니다. 괜히 옛날 전국시대에 다이묘가 자신의 봉토를 자식에게 세습하듯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이런 유력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날 경우 누리는 특혜는 상상 초월입니다. 상류층 귀족들만 다니는 일관제 사립명문에서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입학이 예정되어 있고(사립명문으로 들어가는데 이들 학교들은 대부분 고등학교까지 운영하고 있기 때문), 이런 과정을 통해 가문과 가문끼리의 만남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정경유착, 밀실정치가 가능해지는 기반이죠.
이렇게 탄탄대로로 뚫려 있는 ‘간판으로 걸 수 있는 학업’의 길을 걷고 난 뒤 세습을 받을 준비가 끝나면, 지역구를 물려받게 되는데 이 때 후원회가 전체적으로 움직이죠. 이 후원회는 사실상 지역 권력의 모든 것으로, 지역의 돈과 조직을 모두 거머쥐고 있으며 이 후원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뒷배를 봐주는 것이 지역의 정치인이기 때문에 뿌리 깊은 더러운 정경유착의 고리가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지원해서 어떤 이득을 챙겨오는가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후원회에 소속된 후원자들의 물밑 경쟁도 엄청나죠. 지역에서 수대 째 정치를 해 온 거물 정치가의 아들, 그리고 지역에서 돈과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후원회의 존재. 후원회가 모금한 정치자금은 완전 비과세로 상속이 가능하니, 누가 와도 지역구에서의 싸움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 상왕정치, 밀실정치, 인맥정치, 정경유착, 비리 등등등…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잘못되어 있는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틈조차 쉽게 발견되기 힘듭니다. A지역구 의원이 1로 바뀌었다고 해도 그 1이 0의 세습을 받은 세습 정치인이기 때문에 구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기 때문이죠.
때문에 실질적인 정치는 계파의 힘으로 인해 결정되고 계파 간의 싸움과 정쟁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방이 바뀝니다. 후원회의 힘으로 움직이며 다른 지역과의 후원회와 결탁이 되어 정치인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정치는 은퇴한 전 지역구 의원의 입심으로 움직여 상왕정치의 행태를 만들고 투표에 뽑혀 새로운 지역구 의원으로 ‘만들어진’이는 국회로 나간다 한들 이미 만들어 진 인맥과 밀실에 의해 자신의 의사결정이 봉해지게 되죠. 이 가운데 정경유착과 비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진, 뿌리깊은 세습주의로 시작된 유착으로 인해 당내 계파와 세력이 강화되고 결국에는 이들이 지지하는 쪽에서 국가 최고 권력자인 총리가 선출되는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출, 지명된 총리가 최고 권력자로 내각을 형성해 장관들을 뽑게 되고, 결과적으로 당내 계파로 인한 내각, 즉 정부가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죠. 실질적으로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기 어려운 구조인 셈입니다.
결국 민의가 아니라 혈연과 지연, 그리고 계파와 밀실에서 이루어진 정치의 이합집산으로 만들어 진 정부의 수장이 총리이기에, 작금에 이르러 일본 정치에서의 총리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각제이기 때문에 총리를 국민들이 직접 뽑을 수는 없지만, 국회와 당에서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통해 민의를 반영해야 하지만 정치의 풀뿌리부터 그런 시스템이 완전 전무하고 또 개선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습니다.
- 총리가 갈려도 ‘늘공’들이 이끌어가는 나라
선출권력이 민심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막후정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최고 국가 권력자의 위상은 사실 ‘허상’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의 청와대와 장관들이 국가기관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제해 권력의 중심에 있지만, 일본은 총리 자체가 리더십이 없고 당내 기반이 없을 경우 언제든지 목이 갈릴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본 정치의 간판이자 대외 권력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총리의 임기가 매우 창렬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내각제가 된 메이지유신 이후 3년 이상 재직한 총리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일본 정치의 현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죠. 더욱이 일본 정치인들이 전면에 나서서 총리를 하는 것보다는 실세로 상왕 노릇을 하는, 막후의 최고 보스 같은 역할을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실권을 가진 정치인이 되고 싶어하죠.
이렇기 때문에 내각, 그리고 정부도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계파의 합의로 인해 만들어 진 권력이고 그로 인해 이합집산이 된 조직이기 때문에 장관(내각대신)들이 전문성이 부족해 결국 ‘늘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트 관료들에게 기대는 현상이 자주 나옵니다. 실질적인 행정권력은 총리가 갈리거나 내각대신이 사라져도 항상 그 자리에서 일을 하는 엘리트 관료들이 쥐고 있기 때문에 리더십의 부재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일본은 오래 전부터 국가 재난이나 조류독감 등 즉각적으로 정해진 행정력이 발동되어야 하는 사례들에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프로세스가 발동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변수가 발생하거나 상위 기관에서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결단력이 필요한 일들에는 우왕좌왕하다 이도 저도 안 되는 행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악습의 고리를 끊는 것은 정권 교체인데, 문제는 이런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민주당이 거한 삽질과 함께 자민당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자신들도 똑 같은 계파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만 천하에 보여주면서 ‘정권교체’라는 수식어가 민망할 정도로 짧은 기간 안에 정권을 다시 헌납하고 말았죠. 이 과정에서 그나마 70년대 전공투 세대 이후 정치에 관심을ㄱ 가졌던 국민들이 다시 정치권에 학을 떼는 일이 발생하며 일본의 정치 불신과 정치참여 저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악습을 끊을 수 있는 기회는 요원한 것이죠.
이런 이유 때문에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일본 정치의 핵심이자 과두라고 할 수 있는 내각총리대신은 대부분 힘이 없거나 혹은 얼굴마담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파의 힘이 아니면 총리로까지 부각될 수 있는 입지를 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권력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일본에서 총리가 사임하고 후임 총리로 누가 지명된다 한들 사실 그다지 호들갑 떨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벌 없이 관료형 정치인을 고수한 대표적 인물이 스가 요시히데인데, 이로 인해 갈팡질팡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1년 약간 넘는 수준의 임기만을 가졌을 뿐이었죠. 게다가 후임 총리들로 거론되는 인사들 또한 일본의 대외정책이나 우경화에 더욱 강력한 채찍을 가할 인사들 뿐이니, 우리나라 언론에서 ‘후임 일본 총리가 되면 어쩌구 저쩌구’하는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다 말장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등록안내
0
0
힙합사시미
곰동아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