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박 화대종주 폭망기

안녕하세요.

등포 눈팅족 중 한 명인 무사만루라고 합니다. ㅎㅎ

등포에 들락거린 지는 꽤 됐지만 혼자 산에 갈 땐 거의 사진을 찍지 않는 사람이라 산행기라면 그래도 사진도 좀 있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올리기가 약간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팅족이 되었습니다. ㅋ

산은 봄, 여름, 가을엔 수도권 산 두루두루 다니며 겨울엔 설산 풍경 보러 원정 산행 위주로 다니는 스타일이고 장거리라고 해봐야 한두 달에 한 번 북한산 종주나 어쩌다가 생각날 때 지리산, 설악산이나 타던 제가 올 초 갑자기 머리에 바이러스가 침투했는지 화대종주를 해보고 싶은 겁니다. 한마디로 미친 거죠 ㅡ ㅡ

그래서 올봄부터 청광 종주, 관악산 11국기봉, 무박 오색 – 공룡 – 백담사 산행으로 등력을 키워 오며 30km 이상 되는 장거리 산행 최소한 1번은 경험해보고 가을에 화대종주에 나설 계획이었습니다만,

아… 못 기다리겠어요. ㅋㅋ

무릎 부상 이후로 예전만큼 달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5~10km 일주일에 1~2번은 뛰어주니 기초 체력은 되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더불어 계룡산다람쥐 님의 글이 안 그래도 타오르는 가슴에 휘발유를 쫙...

각설하고,

어제 xx산악회 버스로 무박 화대종주에 도전을 했다가 폭망하고 집에 온 후기를 적어볼까 합니다

준비물

배낭 : 그레고리 살보24리터

의류(입고 갈 옷 제외) : 반팔 3개(땀쟁이라 ㅠ) 반바지 1개, 조끼 1개, 바람막이 1개, 양말 3개, 모자 1개, 팔토시 2개, 버프 3개, 반장갑 1개, 손수건 6개

먹을 것 : 주먹밥 5개, 단무지, 초코파이 4개, 에너지바(한 입에 쏙 들어갈 크기) 9개, 연양갱 1개, 목캔디 10개, 파워젤 4개

의약품 : 1회용 밴드, 아스피린, 진통제, 정로환, 식염 포도당, 압박붕대

식수 : 얼린 물 500mL(주먹밥 보호용), 700mL 1개, 500mL 1개(노고단 대피소까진 빈 통)

기타 : 스틱, 무릎보호대, 1회용 우의, 레그컴프레션, 스웻거트(헤드밴드), 배낭 커버, 선크림, 호루라기, 비닐봉지   

이렇게 준비하고 배낭 무게를 재보니 7kg이 살짝 넘습니다.

“안 돼 안 돼”

고수님들 보면 배낭 무게가 가볍던데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옷을 뺏다 넣었다 초코파이를 뺏다 넣었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와이프나 애들이 참 한심한가 봅니다.

“그냥 가져가. 그거 하나 뺀다고 무게가 뭐 얼마나 준다고!”

갑자기 인상 깊었던 등포 어느 님의 닉이 떠올라,

“모르시는 소리 하시네. 내 잘 가는 등산커뮤니티에 먼 길 갈 땐 눈썹도 떼고 가라고 하시는 분도 있어. 장거리엔 그만큼 무게가 중요하다고.” 하며 고수 흉내를 내보지만 결국은 뭐, 다 그냥 배낭에 들어가는 거로…ㅎㅎ

버스 탈 때 마음가짐은 시간 안에 완주면 베스트요, 무릎 같은 통증에 의한 문제라면 중탈, 단순한 체력 처짐으로 인한 문제라면 시외버스 타고 올라오더라도 완주였습니다. 

22시에 출발한 버스는 죽전을 들러 화엄사로 향합니다.

여산 휴게소에 들렀을 때 우동 한 그릇 먹고 도착 직전 정신도 차릴 겸 핫식스 1개 먹습니다.

화엄사 --> 노고단대피소

버스에서 잠을 못 자는 편이라 한숨도 못 자고 화엄사에 내리는데 꼴랑 5명.

40명 정도 되는 인원이라 그래도 반 이상은 화대종주를 뛰는 사람이겠거니 지레짐작했지만 5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숫자였습니다.

야간 산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았고 가더라도 친한 후배랑 둘이서 다녔던 터라, 혼자 야간 산행은 올봄 설악산 무박이 처음이었습니다.

더구나 설악산은 중반까진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람의 냄새를 느끼면서 갔었죠.

처음 산행 신청할 때부터 ‘혼자 하는 야간 산행이라고 특별히 다를 게 있겠어.’ 가면 되지 마음먹었으면서도 내심 등력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인기척은 느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저 멀리 우주로 보내고 약간 긴장이 됩니다.

잠깐 장비 정리하는가 싶더니 세 분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저도 한 분을 남기고   오르기 시작합니다.

아….

근데 이게 무슨 길옆으로 신우대가 잔뜩 있는 게 무슨 전설의 고향 느낌이 나면서 멘탈이 서서히 흔들리는 걸 느끼며 계속 오르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순간 저 멀리 바닥에 갑자기 사람 머리가 보여서 육성으로 비명이 나오는 걸 겨우겨우 참고 다시 보니 한 분이 무슨 배수로 같은 곳에서 급한 용무를 해결하는 중이었습니다.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멘탈은 급격하게 흔들리네요.

더 오르다가 용무 해결하신 분과 뒤에 있었던 한 분이 올라와서 잠깐 얘기를 나누는데 다들 엄청난 고수분들이네요. 특히 용무 해결하신 분은 화대를 11시간 30분대에 끊는다는 말에 깜놀했습니다.

1~2분 그렇게 보조를 맞추다가 그 두 분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지니 이제 진정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서서히 나무들이 도깨비로 바위가 곰이나 멧돼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멘탈이 무너지면서 멀쩡한 헤드랜턴 불빛도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 같고 배낭 무게 아끼려고 여분 건전지 안 챙긴 것도 후회가 되고 3km를 지났다고 알려주는 트랭글 여자 목소리에도 뒤로 자빠질 지경이 되고 보니 우선 빨리 올라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올랐을까 빠른 발걸음에 숨이 가빠오고 허벅지 뒤쪽마저 당기기 시작하자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멈춰 서고 호흡을 크게 하며 잠시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가!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니 귀신은 아닐 게고,

이 시간에 여기에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곰이나 멧돼지는 설령 있더라도 헤드랜턴 불빛에 알아서 사라졌을 거 같고,

결국, 주변이 안 보이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자 다짐하며 다시 걷자 이게 또 효과가 있네요. ㅎㅎ

완전히 두려움이 가신 건 아니지만 물아일체까진 아니더라도 자연의 소리가 느껴집니다. ㅋ

그렇게 코재를 지나 노고단 대피소까지 오르니2시간이 채 못 걸려서 애초 계획한 2시간 20분과 비교하면 상당한 오버페이스였습니다. 이때 오버페이스 한 게 끝까지 발목을 잡지 않았나 싶네요. ㅠ ㅠ

취사장에서 물을 받고 주먹밥을 먹는데 안 넘어가는 걸 꾸역꾸역 반 정도 겨우 먹으며 할머니, 아드님 내외, 손녀로 보이는 3대가 컵라면 먹는 모습을 부러움으로 보다가 걷다 보면 쥐가 올 거 같은 느낌에 아스피린과 식염 포도당 먹고 다시 배낭을 꾸려 길을 나섭니다.

노고단대피소 -->연하천대피소

물도 든든하겠다 임걸령 샘터 그냥 지나치고 사진 찍는 것도 안 좋아해서 간간이 풍경이나 보며 삼도봉 지나 토끼봉 지나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합니다.

구간 소요 시간을 꼭 계획한 대로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틀은 크게 차이 안 나게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 구간은 3시간 10분 잡았는데 비슷하게 걸린 것 같습니다.

마당에 있는 샘터에서 물 받고 주먹밥 1개 반 먹은 후 양말 갈아 신고 07시 36분에 출발합니다.

연하천대피소 -->벽소령대피소

장터목 가서 쉬어야겠다고 계획해서 벽소령대피소를 그냥 지나칩니다.

구간 소요 시간은 1시간 잡았고 1시간 살짝 넘게 통과는 합니다만 허벅지 근육 경련으로 아스피린 1개 다시 먹고 파워젤 1개, 초코파이 1개, 목캔디, 식염 포도당 먹었습니다.

벽소령대피소 -->세석대피소

걸음이 느려지고 몸에 부하가 걸림이 느껴집니다.

오르막에서 자주 쉬게 되고 허벅지에 이어 왼쪽 종아리 근육 경련도 일어납니다.

선비샘에서 물 보충했고 목캔디 2개, 에너지바 2개 먹었습니다.

이 구간 2시간 잡았었는데 10분 정도는 오버한 거 같습니다.

그래도 원래 계획표 상 10시 49분에 통과 계획대로 정확하게 10시 49분에 세석대피소를 지나칩니다.

세석대피소 -->장터목대피소

발걸음이 엄청나게 느려지고 오르막이 너무 버겁습니다.

500미터는 갔겠지 하면 반도 못 가고. ㅠ

파워젤 하나 더 먹으며 힘을 내보고 싶으나 몸과 마음이 따로 놉니다.

허벅지 뒤쪽에 이어 왼쪽 허벅지 안쪽까지 근육이 정상이 아니네요.

계획표대로라면 11시 54분에 도착해야 하나20분 늦은 12시 14에 도착합니다.

물 뜨러 갈 힘이라도 아끼려 매점에서 500mL 생수 3개랑 캔커피 한 개 사서 나오는데 순간 잠깐 현기증도 나고 매점에서 내려가는 계단 몇 개에서 다리 상태를 보니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습니다.

시간상으론 충분할 거 같으나 이 상태로는 뭐…ㅠ

천왕봉까지 갔다가 중산리로 탈출하려면 하산길이 더 힘들 거 같다는 생각에 여기서 그냥 중산리로 탈출을 결정합니다.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ㅋㅋ

야외 식탁에 자리를 잡고 와이프가 정성 들여 싸준 주먹밥을 다 먹어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 젖은 주먹밥을 꾸역꾸역 먹고 시간이 많이 남아서 한참 쉬다가 양말을 갈아 신고 하산길에 나섭니다.

장터목대피소 -->중산리

산에 다닌 이후 가장 힘든 하산길이었습니다.

한 발 한 발 정말 집중해서 내려왔습니다. ㅎㅎ

힘들었으나 나름 재미있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키 174에 몸무게가 85kg에 육박하는 과체중이라(술이 웬수죠. ㅡ ㅡ)…

살도 좀 빼야겠고 몸도 더 만들어서 가을쯤에 다시 한번 도전해봐야겠습니다.^^

이상 등포 눈팅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써보는 산행 폭망기였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