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문재인인가?”

“그렇습니다.”

“앉게.”

남자는 눈빛으로 소파를 가볍게 보았다. 회색 천으로 된 소파 위에는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아있었고, 노란 햇살 사이로 먼지 몇 점이 떠다니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네. 잠시 후에 자네에게 검찰에서 연락이 갈걸세.”

“검찰에서요?”

“검사 임용을 제안할걸세.”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나직한 저음이었지만 어딘지 모를 강한 확신에 차있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있었는데 원래 태어날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 백발이 어울렸다. 백발의 머리카락은 가르마를 따라 곧게 뻗어 있었고, 무테의 안경 렌즈 안으로 검은 눈동자가 재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걸 수락하게.”

“수락이고 뭐고 할 것이 있나요. 저는 연수생 신분인데,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조건을 하나 붙일걸세.”

“조건이요?”

“다시는 반사회적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검찰 조직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그런 이야기라면 더 이상 제가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 재인의 등 뒤로 소파의 스프링 소리가 찡하고 울렸다. 남자는 돌아서 밖으로 나가는 재인의 등에 대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네는 나중에 검찰 총창이 될 재목이야. 어쩌면 더 크게 될지도 모르지.”

“그 검찰총장이 독재정권의 개가 되어 민주주의를 물어뜯는 자리라고 한다면 저는 그 자리를 거부하겠습니다.”

재인은 문 앞에 서서 남자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 때 자네가 구해야할 사람이 있어. 그래서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거야.”

“구해야할 사람이요?”

재인은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지만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사무실 또한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왜, 어떤 경로를 통해 이 곳에 온 것조차 알 수 없었다.

‘고문을 받았던가...?’

재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고문을 받은 것치고는 몸이 너무 멀쩡했고 옷차림 또한 말끔했다. 수료를 앞두고 있는 사법연수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네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

“그것보다 자네가 구해야할 사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지.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먼 미래에는 이 지긋지긋한 독재정치가 끝나는 날도 있지 않겠는가. 그 무렵에 한 남자가 대통령이 될 걸세.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꾸며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불행하게도 임기가 끝난 후에 검찰 수사를 받게 될 걸세. 자네가 만약 지금 검찰의 임용 제안을 수락한다면, 자네는 그 때 그 남자를 구할 수 있게 되네.”

재인은 한동안 말없이 남자를 노려봤다.

“지금 저하고 점을 보자는 겁니까? 게다가 정의와 상식을 꿈꾸던 사람이 왜 검찰조사를 받습니까? 게다가 제 인생을 걸고 한 남자를 구해야할 만큼 그 남자가 가치 있는 인물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인물이냐고,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재인은 코웃음을 치며 남자에게 대답했다.

“들어나 봅시다. 제가 왜 그 남자를 구해야하는지.”

“자네는 아직도 모르겠나. 내가 누구인지.”

남자는 안경을 벗어서 재인에게 자신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재인은 놀라서 잠깐동안 말을 잇지를 못했다.

“그래, 내가 바로 자네야. 이곳은 자네의 꿈이지. 삼십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 자네는 지금 검찰이 되지 않은 것을, 그리고 그 남자를 구하지 못할 것을 후회하게 된다. 재인아. 부탁한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부패한 조직이더라도 그 내부에서 개혁을 하면 되지 않겠나.”

재인이 딛고 있는 건물의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라지고 있었다. 꿈을 인지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남자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 남자의 이름만이라도 기억하게. 노, 무, 현일세. 노무현.”

재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면담을 앞두고 앉아있던 대기실에서 잠시 졸았던 것이다. 검정색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대기실로 나와 재인을 안으로 불렀다.

“자네가 문재인인가?”

“네, 그렇습니다만.”

“자네 이번에 연수원 수료 성적이 수석이더구먼. 그런데 안타깝게도 경력이 좀 그렇구만. 대학재적, 강제징집, 징역...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네. 자네가 이 각서에 사인만 한다면 자네는 수료 후에 검찰로 가게 될 걸세.”

재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금방 꿈에서 본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서 어른거렸다. 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 검찰로 가는 것을 수락하는 말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래, 생각해보게. 지금까지 왜 그렇게 자네가 당했는가. 힘이 없기 때문일세. 자네가 원하는 민주주의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야. 자네, 애국심이 뭐라고 생각하나. 휴전선 너머의 북괴는 일측즉발의 상태이고 세계경제는 예측불허의 상황일세.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해나가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에게 결연하게 말하며 그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떤 좋은 결과가 있다 하더라도, 그 길이 불의로운 길이라면 저는 그 길을 가지 않습니다.”

며칠 후, 재인은 부산행 기차 안에 있었다. 기차 안에서 변호사 협회 명단을 훑어보고 있었다. 귀에 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무현.’

(30여년 후 봉하마을)

“저러다가 비서실장님도 쓰러지시겠어요.”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남자를 선잠에서 깨웠다. 남자는 번쩍 눈을 뜨며 꿈에서 깨어났다. 젊은 시절의 꿈을 꾼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에도 이 꿈을 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꿈은 두 번 꾸었으나 그 때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고, 지금의 그는 젊은 날의 그가 받아들이지 못할 제안을 한 것이었다.

‘꿈을 꾸었군. 젊은 시절의 꿈을. 그래, 그 때 어쩌면 그 때 검사가 되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남자는 일어서서 걷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터라, 그의 다리는 휘청거렸다. 뜨거운 여름의 햇빛에 땅은 바싹 말라 있었고, 그 땅을 밟는 자신의 살아있는 다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산 적이 없다. 권력을 갖기를 원한 적도 없고, 부를 축척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인권 변호사로 살아가는 것이 그 자신의 명예라고 생각해왔다.

‘그래, 지금까지가 바꾸지 못할 운명이라면, 지금부터의 운명은 내가 만들어간다.’

남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문득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