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초과학을 지원해야 할까? 그건 기초과학이 국가의 입장에선 생명보험의 성격을 지닌 분야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해서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은 없다. 보험은 혹시 모를 재난에 대비하는 예방의 성격을 지닌다. 기초과학으로 창출된, 단기적으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은, 향후 혁신기술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며, 다양한 지식과 융합해 시너지를 창출하는 일종의 지식창고 역할을 한다. 물론 기초과학을 반드시 생명보험에 빗대 지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그런 성격의 투자여야 한다.
비유를 바꿔보자. 한국 영화 시장에서 주연급이 된 배우들 대부분이,열악한 상황에 놓인 연극계에서 배출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연극계를 기초과학에, 영화계를 산업계에 빗대 생각해보자. 연극계가 없다고 해서 영화계가 망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설경구, 송강호, 황정민처럼 현실의 경험을 연기로 표현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배우를 만날 수 없을 뿐이다. 누군가는 연극처럼 큰 수익이 나지 않는 예술 장르에 장기적 안목으로 계속해서 지원해야 하는 이유를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가 합의해야 하는 일이며, 사회의 문화적 수준에 따라 결정될 일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다. 한 사회가 지닌 기초과학의 수준은, 그 사회가 과학을 대하는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pp52-53
『과학계가 처해 있는 현실은 참담하다. 우리는 더 이상 교과서에서 배웠던 과학자의 모델을 찾을 수 없다. 그런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도 보이지 않는다. ... 기술과 밀접한 몇몇 분야의 과학을 제외한다면, 기초과학의 토대는 허물어져가고 있다. 이는 한국에 특수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네이처〉지는 2015년에만 26만 명의 과학기술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가 등장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는 2002년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2011년 〈네이처〉지에 '학위공장 PhD factory'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실렸다. 과학기술의 선도자 역할을 자처하던 미국에서조차 과학기술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는 내용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이 학위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계는 대학과 보조를 맞춰 거짓말을 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공급의 과잉이 문제인데, 박사학위 소지자가 부족하다는 엉뚱한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는 것이다.』 pp51-52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미국 재벌들의 과학에 대한 사랑 중 가장 큰 사랑은, 가장 악독한 부자로 알려져 있는 존 D. 록펠러에게서 나왔다. 우리는 록펠러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록펠러 재단의 사례가, 재벌의 비윤리적 경영과 불법 승계가 기승인 한국사회에서 재벌과 시민 그리고 과학자가 모두가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을 제공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명한 사실은, 록펠러 재단이 없었다면 현재의 분자생물학과 초파리 유전학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역사란 원래 아이러니투성이이니 말이다.
미국 스탠다드오일의 설립자이자 국제적 거부였던 록펠러는 미국 역사에서 손꼽힐만큼 부자였고, 그 악명도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부에 대한 사회의 질투를 우려해 1913년 록펠러 재단을 만들고, “전 세계 인류의 복리를 개선”하겠다는 재단의 목표를 세웠다. 이후 록펠러 재단은 의료와 보건의 문제를 주요 관심의제로 설정하고 재단을 운영해왔다. 록펠러 재단이 공헌한 일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예로 중국에 현대의학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존스 홉킨스 대학을 필두로 미국 대학에 위생과 공중보건학과의 설립을 지원했으며, 질병과 백신에 대한 연구에 많은 돈을 지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록펠러 재단이 기초과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중 하나는 20세기 전반 새로운 생물학이 제도화되는 과정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바로 우리가 현재 '분자생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는 록펠러 재단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정착할 수 있었다. 이것을 돌려 말하면, 왓슨과 크릭이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도 록펠러 재단의 연구비 지원정책으로 가능했다는 뜻이다. 분자생물학이라는 학문의 탄생은 록펠러 재단의 지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pp66-67
『수만 개가 넘는 미국의 민간 공익재단들 중, 과학과 기술에만 지원하는 수백여 개의 재단이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제3섹터의 과학이 기능하려면, 개인에게 몰려 있는 부가 사회로 쏟아져 들어갈 수 있도록 부의 재분배를 위한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며, 이에 더해 그 사회적 재분배가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되게끔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바로 이 측면에서, 기초과학과 모험적 기술에 스며든 제3섹터의 지원은 서구사회에서 기원한 과학의 문화적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과학이 문화에 깊게 스며들고 제도가 뒷받침될 때 과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 피드백을 명료하게 보여준 사례인 셈이다. 물론 이런 성과가 돈으로만 될 일은 아니다. 자본과 문화적 인식 그리고 제도적 건강성이 더해질 때에 가능할 것이다.
미국의 기초과학을 떠받치는 공익재단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기초과학의 활로는 정부가 아닌 제3지대 그리고 공익을 목표로 하는 재단의 역할에 달려있다. 정부가 기초과학 연구를 주도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초과학자들도 정부에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된다. 이미 수십년, 한국의 기초과학은 바뀌고 또 바뀌는 정책들로 신음해 왔고, 야심차게 시작한 IBS마저 위기에 처했다. 더 이상 정부의 정책만을 쳐다보고 있으면 안된다. 과학자는 사회를 직시해야 한다.』 p70
『한국 공익재단의 역사가 결코 일천한 건 아니다. 국내 공익재단의 역사를 연구한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재단법인의 시작은 1939 년삼양사 창업주 수당 김연수에 의해 설립된 '양영회'다. 당시 사재 39만원을 출연해 재단의 형태를 갖춘 양영회는 “우수한 과학 분야의 인재 육성을 통해 산업 입국을 목표로”한 최초의 민간 공익재단이다. 양영회는 한국 이학박사 1호인 이태규박사를 비롯, 월북한 과학자이자 북한 초대 원자력연구소장 이승기 등 24명에게 연구비를 지원했고, 자연과학 분야의 장학사업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역사란 아이러니 투성이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과학에 지원하는 공익재단을 거의 볼 수 없는데, 한국 공익재단의 효시가 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니.』 pp72-73
《플라이룸—초파리, 사회 그리고 두 생물학》 김우재 지음 (김영사, 2018)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365368 #플라이룸 #김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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