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지났지만 기억을 더듬어 소환해 봅니다.

가리왕산이 에어컨이란 얘기와 이끼 계곡에 대한 호기심, 100대 명산에... 슬픈 하봉의 얘기도 겸해서 충분히 갈 동기가 되었습니다.

계획은 가리왕산(상봉)-중봉-하봉을 거쳐 회동리매표소로 내려오는 산 넘기였습니다. 문제는 하봉의 하산길이 길이 아니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중봉만 거치고 빽한 뒤 어은골로 수직방향으로 내려가는 계획도 했습니다.

장구목이 입구에는 비좁고 만삭의 화장실이 인상을 찌푸리게 하지만, 바로 도로가 옆에 있는 이런 계곡이 모든 나쁜 인상을 씻어 줍니다.

고도가 나쁘지 않고 둘이 가기에는 비좁고 혼자 가기 적당한 길이 이어집니다. 돌은 다들 젖어 있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고도에 따라 줄어드는 계곡 소리가 아쉽지만 곧 더 큰 게 옵니다.

장구목이에서 만나는 첫 계단입니다. 여기 온 순간 이미 이끼 계곡을 80퍼는 본 것이나 마찬가지 같습니다.

다리에 서서 올라온 방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계곡을 옆으로 낀 채 계곡을 보면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계곡 자체가 주는 시각적 시원함과 실제로 시원한 온도가 콜라보됩니다. 물 줄기가 이렇게 등산로 가까이서 아름답게 흐릅니다.

폭포가 번호가 있답니다. 저는 오르는 도중에 알게 됐네요. 사실 정상이 꼭 목표가 아니거나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그냥 멍하니 앉아 있어도 30분은 보낼 만한 계곡입니다.

등산로는 돌이 넙데데한 채 조각이 난 기와처럼 계속 이어집니다. 넘어져 죽은 나무도 이끼 군단이 덮게 되면 예술작품이 됩니다. 죽었지만 다른 의미로 살아 있는?

계곡 소리가 잦아들면 더 이상 계곡이 없습니다.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만 남습니다. 이 나무도 참 희한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가 그나마 식사를 할 수 있는 최후의(?) 평지 공간입니다. 중간에도 좀 넓은 공간이 있긴 하지만 죄다 젖어 있어 그냥 어디 앉기는 좀 찝찝합니다. 살짝 춥기도 하고요.

임도 이정표가 있는 여기는 하늘 위가 트인 유일한 공간이랄까요? 나머진 나무그늘이 가득한 등산로입니다.

지겹게 오르는 일만 남았습니다. 전화가 되는 공간은 따로 표시가 나올 정도로 아마존 밀림 같기도 하고, 야생 그대로 같기도 합니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나무들이 계속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겨울엔 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꽈배기 같기도 하고... 속은 또 파여 있고...

계속 지겹게 오르면... 저는 평속 3킬로 유지가 최대였던 거 같습니다. 페이스가 꼬일 거 같은 느낌으로 오르막길만 진창 나옵니다.

갈림길이 나오고 정상으로 향하면 하늘이 열리고 큰 나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고사목 같은 얘가 보이면 정상까지 20미터 이내입니다. 여기서의 조망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잡풀이 너무 많고... 정상에 다가갈수록 왕벌? 말벌이 너무 많습니다. 정상에서도 윙윙댑니다.

여태껏 밟고 올라왔던 등산로의 돌들이 탑처럼 쌓여 있습니다. 원래 정상여 있던 애들을 걷어서 쌓은 건지.. 어쨌든 인위적인 탑입니다. 가리왕산이란 팻말에 일본을 뜻하는 날 일 한자가 칠이 벗겨져 있습니다.

여기엔 날 일자에 칠을 안 벗겨 놨습니다. 산림청 것이라 그런가요?

인근 바위에 앉으니 돌에 자기 이름을 애써 새겨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리 좋은 산에 힘들게 올라와서 돌에 스크래치 하느라 몇 십 분 낑낑댔을 걸 생각하면...

구름이 적당히 다른 산 조망을 가려서 분간이 안 됩니다. 다른 분 글을 보면 대충 알 수는 있겠으나...

감흥이 없어 간단히 쫄병스낵 하나와 파워에이드 원샷을 때리고 중봉으로 향합니다. 가리왕산 정상에서 하봉의 인공구조물이 보여서 코앞 같기도 합니다.

중봉 가는 길은 더 야생의 길입니다. 더 잡풀과 축축함이 가득합니다. 나무 기둥 밑을 지나가거나 풀을 헤치고 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지 않기에 더 진귀한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길은 진짜 협소하지만 잃지 않을 정도로 드러나 있습니다.

뿌리 내린 자리가 하필 바위라 기묘하게 안 죽고 자라는 나무도 있습니다. 얘가 보이면 이미 중봉입니다.

중봉은 진짜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돌탑이 다입니다.

돌아가려니 올라가기도 귀찮고 다시 고개 숙이고 가기도 싫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봉을 멀리서 봐 버려서 일단은 하봉을 갑니다.

중봉에서 조금 지나면 화원처럼 트인 곳이 30미터 정도 나옵니다. 가운데 길이 등산로입니다.

오히려 하봉으로 가는 길은 쉬운 듯하지만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냥 쭉 내려가다가 나무 기둥에 칠해진 페인트 표식이나 띠지를 보거나... 그래도 헷갈리면 루가맵처럼 오프라인 지도를 펼쳐야 합니다. 전화, 인터넷 다 안 됩니다.

오르내리막이 조금씩 계속 반복되던 중 왼쪽에 트인 길이 보입니다. 임도가 거대하게 만들어져 있고, 속도감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가로등도 있습니다. 실제로 불이 지금도 들어오는지는 모릅니다.

하봉 정상입니다. 중간의  바로 앞이 중봉, 희미한 뒤가 상봉 정상입니다.  하지만 바로 앞의 구조물 폐기물?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슬로프 만든 뒤 평창올림픽 때 사용된 거 같긴 하지만 이것조차도 만들다 만 느낌입니다. 완성이 안 된 상태로 어거지로 하봉을 밀어버리고 설치한 거 같습니다. 케이블을 따라 내려가면 길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하산을 모험으로 하고 싶진 않습니다.

뒤를 보면 더 흉측합니다. 완성된 건물이 있어도 흉측한데 이건 만드는 중인지 철거 중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전 하봉 하산길이지만 하봉을 밀면서 돌들을 등산로든 아니든 주변으로 다 밀어넘어뜨려서 길이 보이지 않고 내려가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며, 내려간 뒤 다시 올라가기도 위험해 보입니다. 분명히 루가맵에선 여기가 내려가는 길입니다. 돌들에 나무 기둥이 덮혀 있습니다.

다시 중봉을 향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하봉 하산로가 있을까 쳐다보지만 그 어떤 쪽에도 진입할 길이 없습니다. 명백히 밀어서 만든 임도가 확실해 보입니다.

중봉으로 올라가다가 길을 잃어 헤맸습니다. 내려오는 건 잘됐는데 올라가려니 진입로를 못 찾겠습니다. 길이 안 보입니다. 루가맵이 없었다면 엄청 헤매거나 길을 만들며 가다가 넘어지거나 풀에 긁혔을 겁니다. 중봉에서 하봉 가는 길 사이 이정표에서 하산을 택합니다.

생각보다 하산길이 괜찮다 생각했지만 5분도 안 지나 급경사와 진흙길, 바위절벽 같은 게 드문드문 등장합니다. 3번 정도 미끄러질 뻔했지만 어찌저찌 지겨운 하산 끝에 임도를 만났습니다.

무릎이 너무 시큰하고... 스틱도 위험해 보입니다. 체중을 너무 싣게 되고 경사가 가팔라 버틸까 싶습니다. 이번 달에 스트랩 끊어진 농협스틱이 바로 여기서 활약했습니다.

임도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세로로 직하강 하는 게 정상 하산길이기도 하지만 위에서 바라만 봐도 도리도리질이 절로 됩니다. 한편 임도로 하산하는 길도 너무너무 깁니다. 임도 주변에 큰바윗돌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건 장산의 풍경과도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망이 안 좋아 사진으로 예쁜 사진 모양이 잘 안 잡힙니다.

임도길은 오토바이로 산 타는 사람들이 흙을 파놓고 다녀서 물이 고여 있습니다. 안 그래도 사고가 났는지 한 명이 앉아 있고 오토바이 한 대는 누워 있고, 119 구조대 차량 두 대, 구급대원 여러 명이 보였습니다...

물이 안 고인 쪽은 풀들이 40~50센티미터 정도로 자라 있어 진흙길을 택하거나 풀을 거쳐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풀들... 도깨비 바늘 같은 씨앗이 있는 풀들이라... 지나가면 바지가 엉망이 됩니다. 신발 외피 가죽도 마구잡이로 생채기가 납니다...

길이 좋다 싶으면 물바다입니다. 사진으로 구별 안 되겠지만 수심은 3~5센티미터 정도 됩니다.

그나마 좋은 길에서 속도전을 하는데... 너무 하산길이 기네요. 하산이 끝날 때쯤엔 눈파리들의 습격이 있습니다. 정말 끝까지 고통스럽군요.

다음에는 그냥 어은골로만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험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