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지엘론카 <유럽연합의 종말(Is the EU doomed?)>, 아마존의 나비, 2015

브렉시트와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로 위기에 처한 유럽. 유럽인들의 일상 생활을 바꿔놓은 유로존 위기, 난민 사태, 테러리즘, 우크라이나 사태에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는 무기력한 유럽연합(EU). 이런 유럽연합에 점점 신뢰를 잃고 불안해하는 유럽인들에게 얀 지엘론카의 <유럽연합의 종말>(2014)는 ‘유럽연합의 해체’라는 꽤 도발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현재의 위기를 해소할 능력을 잃은 EU는 소멸되는 운명을 받아들이되, 유럽통합은 비정부기구(NGO), 지방정부, 도시를 중심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EU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유럽이 폴란드 출신으로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영국에서 활동하며 범유럽적 사고를 갖춘 학자 얀 지엘론카의 비전이다. “EU는 운을 다한 듯하지만, 유럽과 유럽통합은 확실히 그렇지 않다.”

유럽연합의 진짜 위기는 비교적 해결하기 용이한 경제 위기가 아니다. 결속과 창의성, 신뢰의 부재 같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 있다. 유로존 위기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 등 부국과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등 경제 실패를 경험한 회원국 간의 불균형은 늘어났다. EU와 IMF가 부과한 가혹한 긴축으로 유럽 각국의 일자리와 사회보장, 연금은 재앙에 빠졌으며 불황 국가 국민들의 불만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EU와 IMF는 악화된 빈부 격차, 빈곤, 실업난, 주택난 등을 해결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건전한 민주적 수단이 결여된 EU 정책에 대해 유럽인들은 점차 신뢰를 잃고 있다. EU는 효율성을 위해 민주주의와 국가적 정체성을 양보하도록 회원국들에 강요했지만, 그 효율성조차 충족하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어떤 미래를 가야하는가. 그 동안 유럽과 유럽연합의 전망에 다양한 비전과 주장을 소개한 책들을 접했다. 장 피에르 슈벤망의 <프랑스는 몰락하는가>는 유럽연합을 유지하되 그 권력과 역할을 국민국가로 가져오자 했고, <인간이 먼저다>의 장 뤽 멜랑숑은 신자유주의와 긴축정책을 고집하는 EU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앤서니 기든스는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를 통해 더욱 긴밀하게 통합된 ‘유럽합중국’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유럽합중국은 유럽연합의 위기가 장기화되는 지금 EU의 정관계, 그리고 중도 좌.우파 지식인들로부터 자주 제기되는 대안이다. 얀 지엘론카도 “개별 유럽 국가가 EU보다 국제적 압력 대처에 유리하다”는 EU 회의론자들의 주장은 비판한다. 그러나 유럽합중국은 각 회원국의 정부, 의회, 사법기관들이 새로운 ‘합중국’에 더 많은 권력을 이양하는데 동의해야 가능하다. 많은 회원국들은 2등 또는 3등 회원으로 밀려난다는 두려움 속에 강력한 경제정치동맹/합중국으로의 도약에 주저한다. 설령 모든 회원국이 이를 지지한다 해도 과도한 평준화와 집중화 때문에 유로존과 비유로존 국가들은 더 큰 불화를 겪을 것이다.

독일 중심의 ‘유럽연방공화국’ 방안도 회의적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숙한 민주주의와 유럽 내에서의 지배적인 경제적 지위로 유럽 대륙의 중심 국가로 부상했다. 독일 혐오자들도 유럽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대륙의 방향을 재통합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독일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독일이 과연 그런 역할을 맡고자 하는가? 글로벌 경제위기 앞에서 독일은 자국과 EU의 재정건전성에만 집착했을 뿐, 약소국과 강대국 간의 구조적 차이를 줄이는 조치, 폭증하는 실업과 빈부 격차에 관한 적극적인 대응책은 거의 취하지 않았다. 경제 실패를 경험한 국가들에 상당한 재정 이전을 보증하고,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용인하여 숨쉴 틈을 주어야 할 때, 오히려 독일의 정책수립자들은 자국의 희생과 책임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독일은 스스로 리더십을 맡을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럭저럭 살아남는 현상 유지도 유럽인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해지 못한다.

그러면 유럽연합은 그냥 해체되어야 하는가? 통합을 포기하고 개별 국가 체제로 가는 것이야말로 얀 지엘론카가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여기서 그는 EU 회의론자, 그리고 반EU 극우파와 명확히 선을 긋는다. 통합은 어떤 식으로든 지속해야 한다. 해체된 유럽은 지금보다 더욱 극심한 실업, 파산, 빈부 격차에 시달릴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유럽은 유럽연합이 성취해온 기본적 사회가치들 -인권, 환경, 복지, 노동권- 도 구현하기 어렵다.

역으로 그는 EU라는 관료제 기구의 해산을 통해 오히려 더 강력한 유럽통합을 예견한다. 통합은 시민단체, 인권단체 등 비정부기구, 기업, 지방정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수준의 단위로 이뤄질 것이다. 시민들은 다수의 집단에 정치적 충성을 보낼 것이며 그것은 자국의 영토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 중세처럼 지방과 도시 단위의 공동체가 이끌어가는 유럽, 그러나 마녀사냥과 맹목적 신앙과는 무관한 ‘새로운 중세’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EU의 몰락이 ‘새로운 중세’ 대신 힘의 정치를 우선시하여 전쟁 가능성만 늘어나는 베스트팔렌 체제 회귀를 초래할 것으로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미 유럽 국가들은 영토 확보와 군사적 모험주의를 포기한지 오래되었다. 다양한 클럽과 네트워크로 이뤄진 유럽은 투명성과 책임성이 결여되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접근하기도 어렵다는 경고도 기우에 불과하다. ‘새로운 중세’는 기존 EU나 국민국가의 위계 구조에서 찾기 힘든 다양한 비공식적 통제 체계 -독립 언론과 인권.환경단체, 다양한 노동조합과 모임-가 있어 네트워크 간 상호 감시가 오히려 용이하다. EU 같은 거대한 기구보다 개별적인 네트워크가 개혁하기도 쉽다. 탈중심화된 유럽은 더 유연하게 현실에 적응하고 해결해나갈 것이다.

전반적으로 책의 논지는 매우 선명하다. 유럽연합에 애정을 가진 범유럽인으로서 여러 대안을 꼼꼼하고 성실히 점검한 면모는 친EU주의자들에게도 EU의 운명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어필한다. 그러나 비정부기구, 지방정부, 대도시, 기업이 주축이 된 포스트 EU 체제의 부작용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기업과 유착하여 유럽의 보편적인 노동, 환경 규제를 무력화시키는 지방정부가 있다면 이를 비공식적 통제 체계만으로 제어할 수 있는가? 카탈루냐, 스코틀랜드, 벨기에, 북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의 지역갈등에서 오는 피해와 사회적 비용을 다양성과 다원화, ‘새로운 중세’라는 대안만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가?

혹은 EU의 현상만을 보고 회생 불가능이라 판단할 뿐, 개선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유럽인들의 가장 큰 불만인 긴축정책을 중단하고 복지와 분배 정책으로 전환함으로써 민심과 여론을 되돌릴 가능성은 없는가. 유럽의회와 상임이사회 등 기구들이 점차 민주성을 회복하여 유럽 시민과 원활히 소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브렉시트가 현실화하고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현 상황에 얀 지엘론카가 제시한 유럽의 미래는 충분한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결코 EU의 붕괴나 해체를 바라지는 않는듯하다. 그러나 유럽연합 없는 새로운 유럽을 대비하자는 주장은 EU 회의주의자를 포함한 대중들에게 높은 설득력을 갖는다. 개인, 사회계약, 자유, 평등, 평화, 국가,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민주의, 공산주의, 복지국가, 인권 등 현대 인류의 정신을 이루는 주요 개념들을 만들어낸 유럽의 미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유럽연합의 종말>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비전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이 포스트를 위해 참고한 글

금주의1면(foridealist)님의 블로그 https://foridealist.blog.me/220360477396

Cultivator(yally)님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loveyrc1004/220435404791

그링사의 잡담 블로그 https://blog.naver.com/heisei/220366629668

임명묵님의 '슬로우뉴스' 기고문 http://slownews.kr/69288

얀 지엘론카 교수의 브렉시트 직후 인터뷰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2&aid=0002709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