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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16편
이름:  간담브이


등록일: 2020-11-26 03:34
조회수: 358 /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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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게시글 아이콘[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 시리즈 시리즈란?

 16편

 

 

 

600px-1941_남야영의_김일성.jpg

 

1941년 소련 연해주 라즈돌노예 마을 남야남야영의 김일성-김정숙 부부. 오른쪽 맨 앞의 비스듬히 누운 사람이 김일성이고, 앞줄 여자 4명중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정숙(金正淑, 1917~1949), 세번째가 황순희(黃順姬, 1919 ~ 2020), 네번째가 김철호의 처이다. 이들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쥐어준 권력으로 김일성 일족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어 인민들을 70년 이상 다스릴 세력이다.

 

金正淑, 金貞淑,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은 김일성의 처이고,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은의 할머니이다. 김일성이 만주서 소련으로 월경하기 직전인 1940년 가을에 결혼하였다. 장남 김정일(유라), 차남 김슈라, 장녀 김경희의 생모이다. 김일성은 김정숙 사망후 김성애(金聖愛)와 재혼한다. 김정일이 계모 김성애를 극도로 증오하여 김일성 사망 후 연금하다시피 하고, 감시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김정숙 이름의 한자는 원래 金貞淑 이었으나, 아들 김정일(金正一)이 1980년 김정일(金正日)로 개명하면서 모친 이름의 한자를 金正淑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다.

 김정숙은 아마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한글도 못 읽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김일성과 김정숙이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해 들어간 직후인 1941년 1월 김일성이 작성한 이력서에는 김정숙이 재봉일을 했다고 적혀 있다.

 

북한은 그녀가 백발백중의 명사수라고 주장하는데, 그런 증언도 다수 있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 두 번 초대받아 가서 김정숙을 본 적이 있는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당시에도 김정숙이 총을 잘 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였다.

 

{ 金貞淑(김정숙)은 金日成(김일성)이 「소련」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아내로, 그 때 그의 「부대」 내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또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는 정평이었다.}

 

김정숙은 88여단의 정식 대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군 계급을 부여받은 일도 없다. 다만 부대 관련 일을 돕는 역할은 좀 한듯으로 보인다. 북한이 간행한 김정숙 전기에 '첫 여성 낙하산兵'이라고 했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만주에서 그런 일을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고 소련에서도 88여단 정식 대원이 아니었으므로 낙하산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도 없다.

 

소련에 있을 때 김정숙의 소련식 이름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제88 여단의 정치위원이었던 이조린(李兆麟)의 부인인 김정순(金貞順, 옛이름·김백문[金伯文])은 김정숙의 상사이자 전우였다. 그녀는 김찬정과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소련 체재 중 중국인 및 조선인 대원은 러시아 이름으로 불렸고, 김정숙은 ‘와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조선진주군 정치위원이었던 레베셰프 소장의 부인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뱌츠코에라는 곳에서 김일성 부부를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취재했을 때는 ‘가랴’라고 불렸다고 들었다. 또 ‘베라’였다는 정보도 있으며, 어느 것이 옳은가는 불명확하다. 마을사람들은 김일성에게도 러시아 이름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숙의 소련식 이름은 "니나(Нина)"로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숙은 해방 후 두 아들 유라와 슈라 및 다른 88여단 대원들 가족과 함께 1945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항으로 들어왔다.

 

●  김일성과 결혼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들어가기 직전에 김정숙과 결혼하였다. 김일성과 소련 월경을 동행하였던 서순옥(徐順玉)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1940년 8월에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은 소련으로 향하여 떠났다. 소련 땅에 들어서기 전에 훈춘의 어느 산곡대기에 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혼례를 하였는데 혁명가를 부르며 오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 유격대 전사들은 소련땅에 들어선 다음 김일성 동지가 강위룡과 다른 한 동무를 파견하여 소련 변방 전사들에게 체포당하라고 지시하였다. 체포된 다음에 정황을 소련 당조직에 알리자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체포되어 땅굴 감옥에 감금되었다.” )

 

 

●  김일성과의 결혼 배경

 

만주 유격대 시절 김일성에게는 김혜순이라는 처가 있었고, 김정숙은 김일성의 부하 지갑룡(池甲龍)의 처였다. 그런데 1940년 4월 김혜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된다. 또 지갑룡은 모종의 임무를 띄고 부대에서 파견나갔다가 기한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죽은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짝을 잃은 김일성과 김정숙이 결혼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련으로 넘어간 뒤 지갑룡이 돌아와보니 김정숙은 이미 김일성과 결혼해 있어, 그꼴을 보면서 같은 부대에 있을 수가 없어 1941년 4월 김일성과 함께 만주로 일시 파견나왔다가 부대로 돌아가지 않고 잠적하였다고 한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던 김일성의 전처 김혜순은 이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가 해방 후 북한으로 왔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

 

(이 내용에서 김정숙이 지갑룡과 부부였다는건 어이없는 거짓이다. 지금은 뻔한 사실이 아닌 것을 과거엔 저렇게

김일성을 더욱더 악마로 만들기 위해 조작했다.)

 

김정숙의 사망원인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김정숙의 사인은 병사(病死)라는 설, 아기를 낳다 난산으로 죽었다는 설, 김성애와의 관계에 대해 항의하다 임신 중에 김일성에게 배를 차여 죽게 되었다는 설, 김성애로 인한 가정불화로 자살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신동아 2000년 8월호에는 이런글이 있다.

 

《  1949년 9월22일 김정일이 7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급사했다. “북한의 고위간부들 사이에 잘 알려진 소문은 김정숙이 6번째 아기를 출산하던 중 난산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망명한 고영환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6번째 아이’는 분명 잘못이며 ‘5번째 아이’가 맞다. 그러나 김정숙이 병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 이유는 나중에 김일성의 후처가 되는 김성애의 존재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에 대해서 고영환은 김일성 부자와 친했던 여자 빨치산이었던 황순희(로부터 1970년대 초에 들었다고 하는 귀중한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6·25전쟁이 시작한 해인) 1950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무척 추웠고, 제일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최고사령부의 퇴각 행렬에 섞여 자강도의 강계, 만포까지 후퇴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고 목욕도 못했기 때문에 이가 몸 속을 돌아다녔습니다. 최고사령관 동지(김일성)도 이 때문에 가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그(김일성)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것이 김성애라는 여자였습니다.

 

김성애는 당시 최고사령부 기술서기, 즉 최고사령관의 기술서기였지만, 김일성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온 우리들보다 김일성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김일성의 식사 준비와 의복에도 신경을 써서 김일성이 가려워하는 것을 보면 깨끗한 손수건을 김일성의 옷 속에 넣어드리곤 했습니다. 이가 손수건에 모이면 꺼내서 불에 태운 뒤 다시 손수건을 넣어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영환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전쟁 전부터 시작된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고 쓰고 있다. 김일성 곁에 있었던 홍순관은 다음과 같이 김정숙의 죽음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나처럼 숙청을 피해 중국에 망명한 전 북한간부 일부는 김정숙이 세번째 아기를 출산하는 도중에 난산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의 의료수준은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으며, 중앙간부를 진찰하는 평양중앙병원 전문의들은 절대로 김일성의 처를 난산으로 죽게 할 만큼 무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김일성의 경력을 밝히는 데 일생을 바친 이명영(1928~2000)은 저서 ‘네 명의 김일성’에서 김정숙의 사망원인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평양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조진석(趙震錫, 1901~1990) 박사와 장기려(1911~1995)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숙은 북한의 고급간부들만 진찰받는 특별병원 산부인과 과장 황명곤(黃明坤) 박사 밑에 있던 허신(許信) 박사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전치태반(前置胎盤) 

(자궁 외 임신)이라는 것은 조금만 늦어도 살릴 수 없는데 김정숙이 바로 그 경우였다고 한다."

 

조진석 박사와 장기려 박사는 1949년 9월 김정숙이 사망할 당시 평양에 있다 6.25때 월남하여 당시 사정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만일 당시 평양 특별병원에 산부인과 과장 황명곤 박사와 허신 박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월남한 조, 장 두 박사의 증언은 믿을만하며, 김정숙은 출산중 전치 태반으로 사망한 것이 맞을 것이다.

 

김정숙 사후에 김일성은 1950년 1월 이극로가 아니라 홍명희의 딸과 결혼했으나 홍명희의 딸은 결혼 예전부터심장이 안좋았는데 결혼 후 더 악화되어 죽게되고, 그후 김성애와 다시 결혼했다. 김성애의 본명은 김성팔이다.

 

●  북한의 김정숙 우상화(偶像化)

 

김정숙의 장남 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로도 계모 김성애와 권력투쟁을 벌이는 한편으로 생모(生母) 김정숙을 우상화(偶像化)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김정숙의 손자 김정은도 조모 김정숙의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생모 고용희가 북한에서 천대받는 재일교포 출신이라 우상화에 한계가 있고, 김정은 자신이 "후지산 줄기"라는 비아냥을 당할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또 조부김일성과 부친 김정일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자신이 백두혈통이라는 것을 강조는 하고 싶기 때문에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조모 김정숙이라서 우상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고 한다.

 

    이상..             1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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