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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15편
이름:  간담브이


등록일: 2020-11-26 03:22
조회수: 239 /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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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게시글 아이콘[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 시리즈 시리즈란?

 15편

 

●  간삼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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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삼봉 전투의 일본군 주력 부대였던 보병 74연대 혜산진 수비대(惠山鎭 守備隊)의 1936년 6월 30일 현재 편성표.

 

 

간삼봉 전투는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직후인 6월 30일 함경남도 삼수근 신갈파진의 대안 

장백현 13도구 부응동(長白縣 十三道溝 富應洞) 근처에서 동북항일연군 1로군 2사(師), 4사, 6사 연합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휘하여 일본군 1,500여명을 죽이고,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처럼 주장하나[2], 당시 신문에는 일본군 전사자 5명, 항일연군 전사자 50~60여명으로 일본군이 크게 승리한 전투로 보도된 것도 있다..

 

◇  전투 쌍방 피해

 

 

●  이와 관련.. 당시 3개 언론 신문을 살펴보자

 

◇   1.(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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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07-02 동아일보가 보도한 간삼봉 전투 쌍방 피해

출처 : 동아일보 
 
 
●  쌍방 의사상자 칠십여명다수
 

쌍방의 사상자

칠십여명다수

산채사처소각코귀대

【함흥지국전화】삼십일 오진 일곱시 김일성(김일성)최현(최현)조국안(조국안)이 각각인솔하는 항일국(항일군)오백여명이 합세하야 신갈파(신갈파)대안 두『킬로』의지점백암(백암)에 습격하여 왓슴으로 즉시토벌 군전(전)부대가 출동하야 다섯시간동안 접전한끄테  이를 격퇴하엿다 비적즉의 사상자 오십명에 달하엿스며 토벌군은 사자오명 중경상자 십명 통여인 부사자 오명이엇는바 비적의산채(산채)네곳을 태워버린 후 일일오전여덜시에 토벌군은 원지로 도라왓다

 

《  1937년 07월 03일  석간 2면   기사(사회) 》 조선일보

 

 

1937-07-02_매일신보_전투_쌍방_피해보도.jpg

 

 매일신보가 보도한 간삼봉 전투 쌍방 피해 : 매일신보 1937년 07월 02일 3면 1단 //합류비륙백추격전의 쌍방의 사상당수 토벌대아즉도 긴장리에 대긔 신갈파대안의 토비 (金日成<김일성>,<최현,조국안,산하룡평,길촌구길,삼내무웅혜산,백암공비,비적)

 
[ 매일신보  1937년 07월 02일 3면 1단 기사 ]
 
○  1937년 6월 30일의 전투에 참여한 양측의 병력과 지휘관은 아래와 같다.
 
 
구분 동북항일연군 일본군
병력 1로군 2사, 4사, 6사 연합군 500여명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와 혜산진 수비대 230명; 만주군, 일본 경찰 지원 받음.
지휘관 2사장 조국안, 4사 1단장 최현, 6사장 김일성 함흥연대 김인욱 소좌, 혜산진 수비대 쿠리타 대위
장소 함경남도 삼수군 신갈파진의 압록강 맞은 편 장백현 13도구 부응동 근처

13도구 서쪽에 보이는  간산봉(間山峰, 间山峰)이 북한이 말하는 간삼봉인 것같다. 압록강 맞은 편이 신갈파진(新乫坡鎭)으로, 오늘날 북한의 김정숙군 김정숙읍이다.
 
 
●  전투 결과에 대한 기록과 주장들
 
※  당시 신문 보도와 일본측 기록
 

당시 신문 보도와 일본측 기록에는 전투에서 쌍방 피해로 일본군 측은 전사자 5명, 중상자 5명, 경상자 7명, 동북항일연군 측은 전사자 50 ~ 60 여명이라 하였다. 이를 따르면 일본군 측의 대승이라 할 수 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항일연군 측 전사자 수는 전투 현장에 남겨진 사체의 수로 확인한 것이다.

●  북한의 주장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7장에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나온다고 한다.
 
어떤 자료를 보면 그때 함흥 제74련대를 인솔해가지고 《토벌》에 동원된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인욱이라는 조선인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와 장백의 지하조직들에서 우리에게 보내온 통보자료들은 한결같이 《토벌대》를 이끌고 함흥을 떠난 적장의 이름을 김석원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김석원은 일제가 소문을 크게 내려고 함흥역에서 조직한 요란한 장행식에서 혈서로 《무운장구》라고 쓴 기발을 들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김일성부대를 몰살시키겠다고 매우 격해서 떠들어댔다고 한다.

............

지방조직들에서 보내온 자료를 종합해보면 《토벌》에 동원된 적의 무력은 약 2,000명 정도로 추정되였다.

 

나는 4사, 2사의 지휘관들과 함께 전투방안을 짜놓은 다음 새벽녘에 권영벽, 김재수,정동철을 비롯하여 우리의 부름을 받고 간삼봉으로 찾아온 국내와 장백지방의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혁명조직들의 사업방향과 임무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적들이 간삼봉으로 공격해온것이 바로  이날 아침이였다.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안개가 뿌옇게 끼였는데 최현부대가 차지한 산봉우리에 있는 보초소에서 먼저 신호 총소리가 울렸다.

.............

적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저녁때가 되도록 폭우속에서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런 때 우리는 팔반도쪽에 정찰임무를 받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박성철 소부대와 식량공작조에 련락하여 적의 뒤통수를 때리게 하였다. 김석원은 앞뒤에서 얻어맞을 위험이 생기고 날까지 어두워지자 200명가량밖에 안되는 패잔병들을 모아가지고 싸움터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

간삼봉전투가 있은 얼마후 우리 동무들은 전장근처의 마을들에 갔다가 적들의 패전상을 상세히 알아가지고 왔다.

전투가 있은 다음날부터 적들은 혜산, 신파와 간삼봉 부근에 있는 마을들에서 담가와 우마차, 자동차들을 징발하여 시체운반을 하였다. 그고장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전투직후 간삼봉과 그 일대의 부락들에는 일본군의 시체가 한벌  한벌 깔려 있었다고 한다. 적들은 시체마다에 흰광목천을 덮어놓고 사민들이 얼씬 못하게 단속하였다. 적들이 제일 두려워한것은 저들의 패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였다. 그들은 신문에 간삼봉전투실황을 소개할 때에도 사상자수가 얼마 안되는것처럼 허위보도를 하였다.

김석원이 우리를 치겠다고 신파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는 하루종일 걸렸는데 다시 건너갈 때는 반시간 남짓하게 걸렸다고 한다.

사상자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시체에서 머리만 잘라서 마대나 나무상자에 넣어 우마차에 실어 자동차가 있는데까지 날랐다. 그러면 시꺼먼 풍을 친 자동차들이 그 마대와 나무상자들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시체들을 화장하는 

연기와 냄새때문에 간삼봉지구 농민들은 며칠동안 숨도 제대로 쉴수 없었다고 한다.

시체운반에 동원된 일본병사에게 어떤 농민이 시치미를 떼고 《나리, 달구지에 싣고가는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일본병사는 능청스럽게 《가보쨔》라고 대답하였다. 호박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농민도 싱글벙글하면서 《가보쨔농사가 대풍이군요. 좋은 국거리니 많이들 자시우.》하고 야유하였다. 그때부터 항간에는 《호박대가리》라는 말이 생겨났다. 인민들은 일본군 시체만 보면 《호박대가리》라고 풍자하였다.

김석원과 그의 패잔병들은 번화한 혜산을 거치지 않고 조심스레 신파와 풍산으로 빠져 함흥으로 돌아갔다. 출동할 때는 장행식까지 하면서 떠들썩했던 함흥역이 돌아올 때는 초상난 집같은 광경이였다. 역두에 나온 것은 병영에 남아있던 병졸들 뿐이였다. 그 병사들이 부상자 투성인 출정군인들을 복판에 세우고 거리를 가까스로 지나갔다. 시민들의 눈을 속이고 패망상을 감추자니 그런 궁상스러운짓도 하였을 것이다.

..............

우리는 이 싸움을 통하여 《무적황군》의 신화를 완전히 깨뜨려버리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만천하에 다시한번 과시하였다. 간삼봉전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에 진출한후 항일혁명의 전성기를 마련하는데서 하나의 뚜렷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싸움이였다.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우리의 숙적이였던 김석원은 해방후 또다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최현과 대결하였다. 최현은 거기서 경비려단을 지휘하였다. 리승만이 김석원을 38선가까이에 밀어보낸것을 보면 간삼봉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할 기회를 마련해주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김일성 회고록 주장대로면 일본군 2,000 여명 중 살아서 돌아간 패잔병은 200 여명 뿐이라 했으므로 1,800여명이 전사했다는 말이 된다.

 

 

●  연변(延邊) 학계의 주장

 

중국 연변(延邊)의 학자들은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못하지만, 항일연군 측이 크게 승리한 전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없는 것 같고, 항일연군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일 증언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항일연군 측은 늘 일본군을 피해 다니다 간간이 전투를 벌이는 입장이라 부대도 자주 이동해야 했고, 1로군은 1941년 초에 완전히 궤멸되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기 어렵다. 애초에 기록을 제대로 작성할 여유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간삼봉 전투와 관련한 만주국의 기록이나 만주 신문의 기사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정세도 크게 변하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 항일연군 참여자들의 후일 증언들이 정확하다고 믿기 어렵다고 하는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는것도 문제가 있다. 연변 학계에서의 정확도는 매우정확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도 지금은 연변학계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만한 이유들이 있을거다.

 ■  여기 연변쪽의 자료가 있어서 소개하겠다.

 

 

☆☆  조선족혁명투쟁사 장백현 간삼봉 전역   - 연변일보 2010. 01- 12

 

                         ○  연변일보 -  장백현 간삼봉전역

 

1937년 3월 무송현 동강양목정자회의후 동북항일련(연)군 제2군 제6사는 무송, 몽공 등 지역에서 수차례 전역을 펼친후 5월에 장백현에 돌아왔다.

6월 24일, 항일련군용사들은 2갈래로 나누어 제1군 제2사는 직접 간삼봉(间三峰)으로 향했고 4사, 6사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횡산벌목장에서 적들을 유인했다. 동쪽으로  진군한 부대는 재빨리 횡산벌목장의 괴뢰경찰중대를 습격하고 30명의 적들을 섬멸하고 대량의 무기를 로획, 그리고 신속히 서쪽으로 간삼봉으로 향했다. 부대는 사등방, 북대정자 등 촌을 지나 6월 29일 간삼봉에 이르렀다. 적들은 아군이 간삼봉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접한후 인차 두갈래로 나누어 진공했다. 제6사 7퇀, 9퇀, 경위련 등 200여명 용사들은 동쪽에서 수비했고 제4사 1퇀, 2퇀 6련의 200여명 용사들은 서쪽에서 수비했다. 제2사의 8퇀 4련, 5련은 북쪽에서 방어벽을 세웠다. 지휘부는 3개 사의 18자루 기관총을 한곳에 집중시켜 전초지에 진군하여 총구를 적들을 향해 조준했다.

 

6월 30일, 적들이 동쪽으로 다가오자 아군은 적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고 김인욱이 거느린 일본군은 경안군의 뒤에서 아군의 서쪽 진지를 공격, 그러나 아군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진지를 고수했다. 74련대 일본군은 공을 세우기 위해 미친듯이 아군의 진지를 진공, 적들이 진지와 10여메터 떨어져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무뒤에 숨어있던 아군은 일제히 적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진공이 실패하자 적들은 새로운 작전방식으로 아군을 진공했다. 아군의 제4사 1퇀, 제2사 8퇀, 제6사 7, 8퇀은 인차 적들을 향해 진공, 아군의 진공소리는 하늘을 진감했고 용사들은 적들과 치렬한 접전을 펼쳤다. 전투는 저녁무렵까지 지속되였고 적들은 황망히 도망쳤다. 간삼봉전역은  3개 사가 련합으로 진행한 첫번째 전역이며 항일련군의 영향을 크게 확대시킨 전역이였다.


○  여기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  바로  김일성의 대혁명 선배 '전광'의 이야기다 - 2017- 03- 31

 

{말 나온 김에 간삼봉 전투의 진실도 말씀드리면, 북한은 이를 일본군 74연대 2천명 중 1천5백명을 죽여 ‘호박대가리’ 전설이 나오게 된 전투라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일본군이 150명 정도에 동북항일연군 3개사 500명 정도가 붙은 전투로 실제 일본군 전사자는 50~6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

 

●  한국 학계의 입장  한국 학계에서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한 특징이 있다. 또한, 당시 신문기사나 일본측 기록을 모두 찾아내어 자세히 검토해서 많은 진전을 이룬것 같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에 올라있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에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를 탐지한 동북항일연군 연합부대 500여 명은 간삼봉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주요 진지에 매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은 2개 부대로 나누어 세방면에서 간삼봉 일대에 진입하였다. 6월 30일 8시 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에야 끝날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 군경 50여 명, 일본군 수십명을 섬멸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부응동(富應洞) 근처에서 동북항일연군의 기습을 받고 대장인 김인욱 소좌가 부상을 입는 등 큰 타격을 받고 패주하고 말았다 [일부 일본 자료에는 일본군 전사 5명, 중상 5명, 경상 7명의  피해로 축소됨]. 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이 국경을 넘어 추격해온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 연합부대를 치밀한 매복작전으로 섬멸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는 그후에도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여 일제에 큰 손실을 입혔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60권 한국독립운동사 연표 / 1931~1940년 / 1937년

6.30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김일성)·4사(최현)·2사(조아범) 400여 명, 간삼봉(間三峰)에서 일본군 19사단 74연대와 전투 끝에 승리.
 

●  간삼봉 전투에 대한 한국 학계는 차마 북한 주장을 수용하지는 못하고, 고증이 풍부한 중국 연변 학계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1980년대 말 연변에서 간행된 책들을 근거로 , 항일연군 측이 만주국 군경 50여 명, 일본군 수십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한다. 항일연군 2사장도 조국안 (1900~1937)이 아닌 조아범(1911~1940)이라며 대체로 중국측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또 당시 신문보도나 일본측 기록이 일본군의 . 피해를 축소했다고 주장하지만, 연변에서 뒤늦게 간행된 책들이 당시 기록보다 더 믿을만하다는 확실한 문헌은 없다.

 

김일성 연구를 열심인 후배학자들로부터, 북한 김일성을 가짜로 몬 장본인이라며 집중 비난을 받고있는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新文化社, 1974)에서 간삼봉 전투와 관련하여 1937년 당시 신문기사와 일본측 기록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고 있다.

 

{ 장백현(長白縣) 오지 산악지대로 철수해 갔던 제六師는 함북 무산(咸北茂山) 방면에 출동했다가 철수해온 최현(崔賢) 소속의 제四師 부대와 합류, 三백명 가량의 병력으로 六월 하순 장백현 13도구(長白縣 一三道溝)(신갈파[新乫坡] 대안)로부터 또 다시 국경지대를 습격코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인욱 소좌(金仁旭 少佐)의 혜산진(惠山鎭) 수비대는 六월 二九일에 행동을 개시, 2대(二隊)로 나누어 신갈파 대안(新乫坡 對岸)으로 진출했는데 三○일 새벽에 부응동(富應洞) 근처에서 쌍방 조우, 맹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항일연군(抗日聯軍) 측은 시체 五○여구를 남긴채 후퇴했으며 김소좌(金少佐) 부대에는 전사 五명, 중상 五명, 경상 七명이란 사상자가 생겼다.}

 

역시 이명영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무조건 않좋게 부정적으로 글을 쓰는게 말이다.

 

●  기록과 주장에 대한 검토

 

520px-1936-12-24-폭설로_위기_모면한_조국안.jpg

 

 중국측 2차 문헌에는 항일연군 1로군 2사장 조국안(曹國安)이 1936년 12월 21일 전사했다고 나오나, 1936년 12월 24일자 매일신보는 조국안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폭설에 막혀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였다. 이듬해 1937년에도 조국안 부대가 6사장 김일성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이 자주 신문에 보도되므로, 조국안의 전사 시점은 1936년말이 아닌 1937년 가을 무렵이 확실하다. 

 

이상...          1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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